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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감정과 육체적 질병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내재아란 순수하고 내가 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와 사귐을 원하고, 충분히 양육되고 사랑 받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이것은 인간됨(성숙)에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내재아로 묶어서 사용한다.
그런데 성장과정에서 자기실현이 차단되고 양육이 안되고 억압되고 부정적인 규범에 의해서 잘못 양육되었을 때는 거짓된 자아에 의해서 살아간다. 상처 입은 진정한 내가 숨어버리고 그 대신에 진정한 내가 아닌 것으로 나를 자꾸 꾸며고 만들어서 살아가는 "허구적인 내"가 되어간다.
이번 월드컵에서 분출된 에너지는 억압된 내재아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아 양육의 핵심은 자기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데 에 있다. 예를 들어 행복하게 사는 부부 사이에서 양육되는 아이는 자기를 잘 드러내면서 성장한다.
그 아이는 성장한 후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데 있어 자연스러운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가 역기능의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려고 어른행세를 하는 데 이것이 거짓된 자아이다.
거짓 자아는 자기를 숨기고 억압해 버린다. 남을 즐겁게 하고 과장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자기 내면에는 불안이 있고, 자기실현이 안된 것에 대해 상실감이 있고, 이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짙어간다. 자신의 내면은 허무함, 고독 속에서 슬픔가운데 있는데, 겉으로는 웃는 얼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이를 통해서 생존을 유지해가려 한다.
그에게는 내면에 있는 허무, 고독, 슬픔이 진정한 자기자신이라고 할 수 있고, 겉으로 표현되는 상호의존적인 감정들은 거짓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면적인 문제는 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영향을 준다.
즉 불면증, 신경통의 증상을 가져온다. 이러한 증상들은 증상이전에 문제가 있다. 그 증상들은 약으로만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죄책감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일에 몰두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일에 대한 중독이 되어가고, 문제는 해결되어가지 않고, 육체는 자꾸 쇠약해져 간다. 결국 육체적인 질병으로 나타난다. 바른 치유는 증상이전에 발생한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스위스의 [폴 트루니에] 박사에 의하면 똑같은 말기 폐병환자인데, A라는 환자는 의학처방을 해서 효력이 나타나는데, B라는 환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원인을 보니까, 육체적 기능에 이상이 있는 환자들 대부분이 육체적 질병 이면에 깊은 내적인 비밀(도덕적 비밀, 종교적 문제와 관련된 비밀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육체적 질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격의학협회"를 만들어서 그들의 비밀 이야기, 고통을 듣고, 삶의 문제를 유발시킨 문제들을 듣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질병 자체가 아니라, 그 질병을 유발시킨 근원에서 해방시켜주시려고 오셨다.
기독교 신앙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영적 차원, 정신적 차원, 심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했다면 설령 육체적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만족스러운 생애이다.
잘못된 삶은 육체적 질병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치유하신 중풍병자의 경우 육체적 질병 이전에 그 질병을 가져온 근본문제를 치유하신 것이다. 여기서 죄사함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중풍병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죄, 내면의 깊은 비밀의 문제를 하나님만이 해결하신다는 의미이다. 또한 죄라고 하는 것은 단지 행위적인 죄가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살았거나, 하나님을 믿었어도 건성으로 살아, 육체적 기능이 잘못될 수밖에 없는 그 문제를 용서하고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중풍병이 나은 것은 그의 내면 속에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인 질병은 내면의 문제가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빙산의 일각, 심벌이다. 육체적 증상의 밑바닥에는 큰 얼음덩이가 있는 것처럼, 상징(심벌)로 볼 수 있다. 그 심벌은 곧 어린 시절부터 제한하고 억압해온 감정들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가는 것을 상실해 간다. 그들은 많은 규범들을 스스로 만들어 자신을 더욱 제한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표현을 제한할 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육체적 기능까지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부터 배우면 안된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는 양육 받고 싶어하고, 표현하고 싶어하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제한부터 배우면 이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먼저 자신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가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이렇게 자기 감정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서 10살, 20살, 30살에 되면서 성숙된다. 그러나 표현을 안 하면 성장한 후에도 성숙된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고, 신경질, 충동적인 공격성, 과도한 분노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감정표현이 자꾸 억제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자꾸 신경질이나, 비판으로 자기를 나타낸다. 기독교인의 경우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감정표현을 하게 되면, 종교적 가치, 윤리적 가치, 경건의 문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에 대해 수치감과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에 있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자기를 표현하기를 원하신다(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감정표현을 방해하는 유해한 규범들로써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나 말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다
2) 자신의 개인문제나 가정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상의하는 것은 좋지 않다
3) 이기적이지 말라 어린 시절에 표현되는 인간의 본능은 이기적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자신만의 것을 소유하고 보완하면서 점차 이타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 이것은 먼저 자기실현을 한 후에 다른 사람을 돕는 원리이다.
신앙의 원리에 있어서도 자기 실현이 전혀 안된 사람에게 "이기적이지 되지 말라"는 것은 폭력적이다. 자기실현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요구하신 자기부인이 의 삶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자기실현이 안된 이들에게 "네가 상실한 것이 무엇이냐?" "네게 무엇을 회복시켜줄 것이냐?" 이것을 먼저 물으신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다.
4) 항상 강하고 선하고 완전하고 행복하라. 이것도 자기표현을 억압시키는 제한이다. 이 같은 교육을 받으면 항상 자기 감정을 속이고 마스크를 쓰게 된다. 누구나 약하고 좌절하고 죄지을 수 있다. 기독교 진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해결해 가느냐? 에 초점을 맞춘다. 해결방식을 터득해 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성숙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약하고 좌절하고 문제가 있을 때에 거기에서 긍정적인 것, 창조적인 것을 찾아낸다. 그러나 마음이 병든 사람들은 문제가 올 때 창조적으로 바꾸어놓지 못한다. 문제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연결하여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나 정서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좌절, 실패, 유혹, 시험, 죄가 오지만 이것들을 창조적으로 바꾸어낸다.
5) 일상생활에서 즐거움, 여가,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6) 일을 그르치지 말라.
이렇게 되면 일 자체를 자유롭게 접근해가기 어렵다. 먼저 방어하게 되고 감정표현을 억제해 버린다. 이와 같은 제한들은 얼핏보기에는 매우 교육적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규정들은 인간을 억압하는 요인들이 된다.
자발적이지 않고 강압적으로 억압된 감정들이 오랜 기간 지속될 때 다음과 같은 육체적 기능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1)억압된 두려움 : 만성적인 두려움, 부정맥, 성기능 장애, 신체적 장애
2)억압된 죄책감 : 자기경멸, 충동적 행위, 중독증, 자해적 행위, 다른 만성적 증상 죄책감은 그때 그때마다 풀어내야 한다.
오히려 죄책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까 이 나아가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풀지 않고, 해결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로 연결된다.
3)억압된 수치심 : 자기경멸, 충동적 행위, 중독증, 성기능 장애 우리의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이성적인 영역/ 합리적인 사고기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참 자아(내재아/순수하고 자기가 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미묘하고 복잡한 내부조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심리적인 상호작용이다. 이것을 억압해버리면 이러한 문제를 낳는다.
육체 기능의 장애를 육체적으로 잘못된 결과로만 생각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없애기 위해 약물에 의존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증상은 물론, 근본원인도 해결되지 않게 되고 약물중독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참 자아의 피부와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아가 고통스러워할 때 그 고통이 육체적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동차의 경고등은 자동차 내부의 이상을 알리는 신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도 참 자아의 경고등과 같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질병이나 이상이 올 때에는 내가 잘못 살고 있는 점이 없는가?,
잘못된 삶의 습관은 없는가?,
잘못된 음식의 습관은 없는가? 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육체는 영혼의 전광판과 같은 것이다. 영혼이 덧입은 옷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혼의 고통 또는 내재아의 고통을 가장 잘 반영해 준다. 육체에 경고등이 켜질 때 먼저 내면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오랫동안 억압해온 감정은 없는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온 감정의 억압은 없는가?
이것이 근본원인을 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근본문제인 내면의 문제, 억압된 감정, 그로인한 고통을 해결해주시기 위함이다.
< 토의문제 >
1. 현재 당신의 육체적 장애중에 감정의 억압과 관련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치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있는 부정적인 규범들 가운데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 당신은 당신의 부정적인 규범들을 가족이나 자녀, 친구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습 니까? 그것들이 당신의 척도는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