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욕망은 마음의 중요한 속성이다.
재물, 권력, 명성등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들로 욕망을 다 채울 수가 없다.
종교인이나 수행자들은 깨달음을, 니르바나(涅槃)를,
신성(神性)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의 대상만 바꾼 것일 뿐
접근 방법은 변한 것이 없다.
우리는 깨달음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의 본성이 그 깨달음이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으려함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그것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쥐는 곡식 껍질을 벗겨먹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쌀을 주어도 계속 껍질을 벗기려한다.
없는 껍질을 벗기려하니 껍질이 벗겨지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미 내가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밖에서 얻으려하면 얻어질 리가 없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본성(本性)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빈틈없이 완전한 것이다.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을,
진리를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노자는 “진리는 말해지는 순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언어로는 나타낼 길이, 전할 길이 없으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모든 탐구를 그만두는 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고,
그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그만두는 순간, 문득 찾아온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나의 밖에서 구하려는 시도를 멈추었을 때,
나의 눈은 밖에서 안으로 돌려지고
그것이 안에서 빛나고 있는 그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노력이 멈추는 날, 나 또한 사라진다.
나는 바로 에고이다. 노력이 없으면,
욕망이 없으면 에고는 존재할 수 없다.
에고는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매 순간 만들어진다.
자전거 패달을 밟으면 자전거가 굴러간다.
이 굴러가는 과정이 에고이다.
패달을 밟는 것이
생각하고, 마음을 내고, 노력하는 것이다.
패달 밟기를 멈추면 그 힘이 끝나는 싯점에서
자전거가 멈춘다. 그와 같이
마음을 내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면 에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 마음 내는 것이 멈춰지는 것은
저절로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멈추겠다고 결심하거나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마음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멈추었을 때만 실체가 드러난다.
깨달음이 찾아온다.
욕망이 있으면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욕망은 바라거나 시도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려하면 그 의도가 욕망이 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욕망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저절로
없어질 수 있다. 욕망의 실체를 알고
그것이 덧없는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면 된다.
욕망의 덧없음을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되면 희망 없음과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희망 없음, 무력함 자체가 되어 버린다.
그 속에는 자기라는 것도 없어져 버린다.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념(無念)상태가 된다.
그때 본성이 보인다. 깨달음의 빛이 보인다.
희망은 지평선과 같다. 그것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쫓아가면 그것은 달아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빨리 다가가면 빨리 달아나고,
천천히 다가가면 천천히 달아난다.
지평선과의 거리를 줄일 수 없듯,
희망과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래서 다가가 희망을 만날 수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욕망이라는 다리를 놓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의 다리 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평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평선을 향해 욕망의 다리를 놓을 수는 없다.
다만 다리에 대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마음에서 일어는 이 모든 것들이 실체가 아니어서
허무하고 가치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떨어져나가 희망이 없어지고 무력해진다.
이때 나타난 것이 깨달음이며 자신의 실체(본성)이다.
그러므로 희망 없음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 실현되고,
그 결과 욕망 없음 속에 궁극의 풍만함이 있고,
극한의 무력함 속에서 불현듯
전 존재가 엄청난 에너지를 부어준다.
여기서 희망 없음은 절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망이 없으니 그 반대극인 절망도 있을 수 없는 상태이다.
바로 중심에 이른 상태인 것이다.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상태이다.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고 긍정적인 상태이다.
무력함은 자아가 없음을 말한다.
자아가 없음은 내가 없음이다.
기준이 되는 내가 없으니 모든 경계가 다 없어진다.
아무것도 없는 심연과 같은 비존재 상태가 된다.
이 심연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에너지의 현존, 새로운 빛, 새로운 기쁨이 솟아오른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과거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없어진다.
나(ego)라는경계로부터 완전히 빠져 나와 버린 상태가 된다.
나(본성)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니
내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존재라고 느꼈던 이전의 모든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리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공(空)이며 나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느낌은 어디서 온 것이며
느끼는 주체는 어떤 것일까?
몸은 깊은 잠 속에 있으나 의식은 깨어있다.
이 의식이 느낌의 주체이다.
마치 2개의 극이 완전히 포개지는 듯,
마치 내가 양극 모두 인 듯,
긍정과 부정이 만나고, 잠과 각성이 만나고,
죽음과 삶이 만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이라고 할만한 순간이다.
완전한 일원(一元)의 차원이다.
깨달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공통성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각각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자기만의 조건화를 축척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깨달은다 해도
다른 사람이 따라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갈 수 없는 길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새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음과 같다.
그런데 많은 종교들에서는 교주가 경험했던 깨달음의 과정이
모든 추종자나 신도들에게 강요된다.
각 개인들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한 개인의 체험을 전 인류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깨달음을 체험할 수 없다.
자신만의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 석헌/허경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