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지키는 사람들
호주 원주민 반조 클라크 오래된 미래
1. 꿈의 시대에서 온 사람들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원주민으로 손꼽히는 호주 대륙의 토착민들은 백인들이 쇠로 만든 무기와 치명적인 전염병을 갖고 나타나기 전까지 수만년 동안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오로지 자연이 주는 것에 기대어 살아온 이들은 생명의 원천인 대지를 존중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들은 다른 대륙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대지를 어머니라 불렀으며, 대지가 자신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대지에게 속해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지혜였다. 어떤 부족도 땅에 경계선을 긋거나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다만 부족의 조상들이 살던 곳은 그 영혼들이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다른 부족은 허락없이 그곳에 침입하지 않았다. 강과 호수, 산 같은 지리적인 경계선들이 그곳을 구분해 주었다. 부족들 사이의 이 경계선은 어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어린 세대로 전해졌다.
문자나 책이 없었기 때문에 역사와 신화 등 부족이 간직한 모든 지식은 모닥불 둘레에서 나누는 이야기, 춤, 노래, 그림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그들은 주로 사냥과 채집, 고기잡이에 의존해서 살았다.
남자들은 딩고라는 개를 데리고 캥거루, 에뮤, 왈라비, 거북이 등과 같은 몸집이 큰 동물들을 사냥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더 작은 동물이나 열매, 산딸기, 식물 등을 채집했다. 해안에 사는 부족들은 물고기를 잡고 홍합, 굴 같은 조개류를 주웠다. 사냥 도구로는 창과 부메랑을 사용했으며, 식물의 뿌리를 캐는 뒤지개도 있었다. 부메랑에도 두 종류가 있었다. 던져서 사냥감을 맞추기만 하는 킬러와, 열매와 새를 맞춘 뒤 제자리로 돌아오는 부메랑이 그것이었다. 물감으로 문양을 그린 나무 막대기 창 눌라눌라는 사냥과 의식에 사용 되었다.
단단한 열매와 씨앗들을 돌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들고, 반죽한 것을 땅 위에 피운 불의 재 속에서 구워 먹었다. 그들은 그런식으로 일년내내 풍부한 과일과 열매들을 먹으며 자신들의 드넓은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자연이 주는 양식을 고마운 마음으로 얻었고, 계절마다 신의 축복에 감사하는 전통적인 코로보리 춤을 추었다. 지나치게 많은 동물을 사냥하거나 무절제하게 나무를 베는 법도 없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자연으로부터 얻었으며, 일단 얻은 것은 어떤 부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그 다음 계절이나 또는 그것을 필요로 할 다른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적당히 남겨 두는 것은 모두의 원칙이었다. 또한 자연을 더 강하게 하는 방식으로 사냥을 했다.
파괴되기 쉬운 자연을 보호하는 한편 계절마다 다른 음식을 얻기위해 그들은 한 장소에 일정 기간만 머물렀다. 그럼으로써 너무 많이 사냥하거나 남김없이 열매를 따모으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사냥한 동물의 각 부분은 식량뿐 아니라 옷, 연장, 무기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풀줄기와 나무껍질로는 집과 바구니를 만들었다.
호주는 천혜의 자원으로 유명하다. 땅 속에는 많은 자원이 묻혀 있고 미국과 면적이 비슷해 지구상의 모든 기후가 공존하며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정령들이 원주민들이 간직한 꿈의 시대 신화와 함께 곳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호주 원주민들은 초인간적 형태를 지닌 조상의 영혼들이 나라를 창조하고, 그 조상들이 인간을 창조하고, 법과 종교, 윤리를 정하고 땅의 형태를 만들던 꿈의 시대에 관한 창조신화를 전역의 원주민들이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꿈의 시대 조상혼들이 지금도 모든 곳에 존재하며 그 영혼들이 대지에, 식물과 생물들 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1770년 석탄 운반선을 개조한 악취나는 <엔디버>호를 타고 이 신비의 대륙 동부 해안에 도착한 제임스 쿡 선장은 그곳을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라고 단정짓고 이곳을 영국의 속국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당시 이곳에는 5백개의 부족 주민들이 2백개의 언어와 6백개의 방언을 사용하며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 삶의 원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아가 이 원주민들은 자연환경에 대해 매우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동식물에 관한 상식, 날씨, 산불을 놓아 자연의 순환을 돕는 지혜 등은 어떤 종족보다 탁월했다. 땅을 파헤치기 보다는 초목에 불을 놓는 방법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줄 알았다. 그들은 땅과 자연을 존중하고, 신성한 지역을 정해 종교의식을 치렀다. 죽은 사람은 그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 뒤에서 또는 동굴 속에서 후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늘 함께 했다.
한 부족이 여러개의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주위 부족과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족은 여러씨족들로 이루어졌고 씨족은 10명에서 15명의 가족단위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주변 부족들이 모여 작은 나라들을 이루었다. 각 집단과 부족은 캥거루, 악어, 물고기, 나무등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믿고 보호했다. 또한 회화, 조각, 음악, 춤 등으로 신화를 재현하는 의식은 그 어떤 종족의 문화보다 뛰어났다. 동물의 내장까지 그리는 암각화는이들만의 독특한 미술 양식이었다. 사물의 내부까지 들여다보는 눈은 지혜로운 자의 상징이었다. 몸에 그리는 문양도 개인과 부족마다 달라 다른 사람의 문양을 흉내내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만큼 창조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독립으로 식민지를 잃은 영국 정부는 미국으로 보내던 죄수들을 수용할 새로운 유형지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1788년 1,500명의 죄수와 관리를 태운 11척의 함대가 시드니 항에 도착하면서 백인에 의한 호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죄수들 뿐 아니라 관리들까지도 영국정부가 멀리 내다버려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이들이었다.
함대를 지휘한 선장 아서 필립이 초대 총독이 되었고, 이들이 시드니 항에 상륙한 1월 26일은 호주 국가 탄생일이 되었다.
그 후 80년간에 걸쳐 약 16만명의 죄수들이 호주로 이송되었고, 이들 중 여자 죄수는 2만 5천명 뿐이었다. 이러한 남녀 성비의 불균형 때문에 죄수와 관리들은 닥치는 대로 원주민 여성들을 납치하고 강간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태어난 혼혈아들은 강제 입양되거나 그냥 바다에 버려졌다.
1850년에는 동부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어 골드 러시가 일어났다. 그때까지 40만이었던 백인 숫자가 불과 10년사이에 115만명으로 늘어났다.
백인들의 이주 역사는 곧 원주민들로부터 강제로 땅을 빼앗고 토착민들의 문화를 파괴한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백인 정부는 원주민들을 특정한 지역에 몰아넣고 자신들이 주는 배급물자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 특별지역은 정부가 감독하는 원주민 보호구역과 기독교 선교사들이 관리하는 선교구로 나뉘었지만, 그 운영방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삶의 방식을 잃었고, 언어사용이 금지되었으며, 마음대로 보호구역을 벗어날 수 조차 없었다.
원주민들은 도시지역의 더러운 환경에서 살다 온 유럽인들이 가져온 각종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초대 총독인 아서 필립의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유럽인들과 접촉한 원주민의 반수가 불과 12년만에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유럽의 각종 병균이 순식간에 원주민 수십만을 죽이고 불구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영국 학자들은 처음에 원주민의 숫자가 3만명 정도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내 30만명으로 정정했고, 최근에는 적어도 125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어쨋든 1911년 조사에서 원주민들의 숫자는 불과 3만 1천명에 불과했다. 질병, 대량학살, 굶주림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이른 것이다. 백인 정부는 1967년까지 원주민들에게 시민권조차 주지 않았으며, 197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구 통계에 포함시켰다. 그 전까지는 원주민들의 숫자를 가축 통계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호주 원주민들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본토의 원주민과 북쪽에 위치한 토레스 해협 섬주민들이다. 이들 모두 천지 창조시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고 주장한다.
호주 법원은 아직도 호주 대륙을 주인없는 땅이라고 하는데 국제법은 영국인에 의한 호주점령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호주 법원이 아직 그들의 뜻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이 땅이 주인있는 땅임을 인정하면 그 주인인 원주민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는 이렇게 보고했다.
" 이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는 기생충같은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이 보고서는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에겍도 큰 영향을 주어 그가 인종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호주 원주민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적이라도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상처를 내는 정도로 복수하는데 그쳤으며, 가뭄이 계속되어 배가 고플지라도 또 다른 배고픈 자를 위해 자신들이 발견한 고구마 덩굴 줄기를 땅에 묻어 둘 줄 아는 이 호주 대륙의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다윈의 결론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이다.
반조 클라크는 호주 남동부 빅토리아 주의 프램링햄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족은 군디트마라 국의 키래 후롱 부족이었다. 어려서부터 덤불숲이 그에게는 학교였다. 그는 푸르님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교사가 학생들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단 이틀만에 숲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백인들이 가르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숲에 머물며 전통적인 부족의 어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반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백인들의 강력한 원주민 보호정책과 동화정책이 시행되던 무렵이었다. 원주민 보호정책은 다름아니라 원주민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토지를 빼앗은 뒤, 좁고 열악한 구역 안에 몰아넣어 굶어 죽기를 기다리는 정책이었다. 보호구역에 갇힌 원주민들은 자기자신에 대해 심지어 결혼과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해서까지도 결정권이 없었다.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사라지지 않자, 백인 정부는 동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은 원주민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얼굴이 약간이라도 흰 아이는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고, 나머지는 고아원과 기숙사 학교에 수용했다. 백인들의 충실한 하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 정책의 희생자가 된 아이들은 1910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그 숫자가 10만명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원주민 아이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끌려간 아이들은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고, 심한 체벌과 성폭력을 당했다. 또한 백인 정부는 호주 애 버리지니 종족 자체를 없애기 위해 계속해서 혼혈 정책을 시도했다. 원주민과 백인을 결혼시킴으로서 3대가 지나면 거의 백인 모습으로 바뀌게 만든 것이다.
행복했던 황금빛 어린 시절을 부족의 어른들과 함께 숲에서 보낸 반조는 도시를 떠돌며 건설노동자, 천막권투선수, 벌목꾼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비인간적인 도회지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부족의 땅으로 돌아와 원주민의 방식대로 생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부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으며, 키래 후롱 부족의 어른으로서 그가 가진 도덕적인 권위는 그의 명성과 더불어 호주 전역에 알려졌다. 이 책은 종이위에 쓴 것이아니라 부족의 전통에 따라 모닥불 가에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그것을 평생에 걸친 친구였던 바하이교 신도 카밀라 첸스가 받아 적었다.
자신의 부족이 눈앞에서 하나 둘 사라져가고, 문명인들의 침입으로 대지가 슬픈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사라져간 것들이 사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며, 여전히 이 대지위에서 다른 형태로 숨쉬고 있음을 믿었다. 따라서 대지는 신성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신성한 대지에 속해있다. 이것이 바로 '꿈의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호주 원주민들의 믿음이다.
2. 덤불 숲에서 보낸 어린 시절
우리 부족이 사는 덤불숲 아래쪽을 흐르는 홉킨스 강은 누구에게나 신성한 강이었다. 그곳에서 우리 부족은 생의 황금빛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골짜기 어디서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나는 프냄링햄 원주민 보호구역 한복판에 자리잡은 나무껍질로 만든 작은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우기 가족 전체가 그 땅을 떠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어렸을 때는 마을에서 멀리 나가 본 일도 드물었다. 사람들 얘기로는 내가 1922년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생일이 언제인지 잘 모른다. 나도 내 생일을 모른다. 백인들이 내게 번호를 붙여 주었는데 그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형제와 누이도 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다. 누이동생은 덤불숲에서 태어났다. 남자 형제는 모두 넷이고, 여자 형제는 다섯이었다. 큰누이는 쿠메라군자 원주민 보호구역에 있는 머레이 강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초에 잠시 그곳에서 사셨다.
내가 어렸을 때 프램링햄 원주민 보호구역은 숲이 우거진 오지나 다름없었다. 문명의 발깋이 닿지 않은 원시림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나무껍질로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으며, 오래된 집들도 몇 채 있었다. 그 당시 수백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백인들이 주는 배급에 의존해서 살앗지만,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훗날 오래된 집들은 모두 헐렸고 나의 할아버지가 지은 집만 남았다. 백인 관리들은 원주민들이 집을 좋게 단장하거나 방을 하나 더 늘리면 임대료를 올렸다. 화가 난 부족사람들은 끝까지 돈을 내기를 거부했고, 임대료 징수원들은 포기하고 자리를 피했다.
어렸을 때 나는 오두막집을 짓는 법을 배웠다. 샘물 언덕에서 살 때는 날마다 물을 길어다 먹었다. 그 샘은 오늘날까지도 있으나 아무도 이제는 그 샘에 물을 길러가지 않는다.
갓난아이때 나는 흰족제비에게 목을 물렸다. 아버지는 찜질약과 소금 등으로 직접 치료하셨다.그리고 등유로 소독한 바늘과 실로 상처를 꿰맸다. 아버지는 그런 치료를 많이 하셨다.
어린시절 나는 언제나 부족의 어른들과 함께 지냈다. 특히 삶을 사는 방법, 나눔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모든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 자연을 더 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냥을 할 것과 사냥한 동물이나숲에서 벤 나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또한 다른 사람이나 동물 앞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고 일깨웠다. 어떤 식물이 치료에 쓰이고 어떤 식물에 주의해야 하는가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언젠가는 내가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전수해 줄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런 분이었다. 부족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어른이며 보호자였다. 해가 지고 나면 아버지는 거의 날마다 나를 데리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잠들어 있는 무덤들 사이를 산책했다. 그곳에서 무덤들 속에 묻힌 순수혈통의 옛 원주민들 이름을 몰래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부족의 어른이 되면 지식을 전수할 만한 진실한 사람을 찾기위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 우리 부족의 전통이었다. 백인들이 강요한 기독교 신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례식때마다 부족의 관습을 지켜나갔다. 나이 어린 아니들까지도 무덤 앞에 와서 울었다. 모두가 울고 통곡했다. 그리고 함께 노래했다.
이때 동물이 나타나면 떠난 자의 영혼이 그 동물에게 깃든다고 믿었다. 부족의 땅에 묻히면 영혼이 평화를 얻고 부족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우리 원주민들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부족의 땅에 묻히지 않으면 그 영혼은 영원히 슬프게 이곳저곳 떠돌 게 될 것이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누구나 고향에 돌아와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
3. 부족의 어른들에게서 배우다.
부족의 노인들은 물고기 잡은 어망을 흐르는 강에 설치했다. 때로는 토끼나 주머니쥐를 잡아 덤불에 숯을 피워 감자와 함께 구워 먹었다.
우리는 덤불 속에서 손들어 라는 놀이를 자주 했다. 그 놀이는 사람이나 동물을 찾는데 큰 힘이 되었다. 어두워지면 물고기를 잡으러 갓다. 창을 던져 잡거나 돌이 많은 곳에서는 어망을 놓았다. 고기잡이는 비가 와서 모든 뱀장어들이 바다로 떠나기 전에 해야 했다. 어른들은 어망을 놓을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지 알고 있었고, 모든 아이들이 그 일을 거들었다. 강을 따라 언제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좋다. 내게 이곳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말했다.
" 이겨내는 법을 배우라.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를 품지 말라. 너를 공격하는 사람들게게 다만 연민을 가지라. 너에게 욕을하며 '이 검둥이, 저 검둥이'하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품으라. 그 사람들은 삶이 행복하지 않단다. 자신들의 가정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것이다. 그들이 널 그런식으로 불러도 넌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라. 언젠가 네가 그들을 도울 날이 올 것이다."
어른들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쳤고 나는 오늘날까지도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미움과 적대감을 품지 않는다. 그들이 내게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때로 화를 내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의 재미있는 면을 찾아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오늘날 내가 만나는 젊은이들은 부족의 어른들과 대화하고 만나볼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런 가르침들도 접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화내는 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들 고유문화, 대대로 이어져온 삶의 원칙등을.
삶의 원칙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마약에 취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젊은이들이 어디서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다.
그들이 숲으로 돌아가 옛 부족의 어른들처럼 살지 않는다면 결코 해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돈과 자동차같은 것들은 신경쓰지 말라. 숲으로 돌아가서 살라.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해보라.
부족의 어른들은 나와함께 어린시적을 보낸 대부분의 친구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안 듯하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와 삶의 원칙을 전수할 사람으로 나를 선택해 늘 곁에 두었던 것 같다. 이제는 재가 나의 얘기를 듣고싶어하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들려줄 차례다. 남아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발레와 오페라를 만들었듯이 우리 원주민은 이야기와 노래로 역사를 기록해 왔다.
우리는 부족의 생존에 필요하지 않은 짐승은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또한 필요한 것 이상으로 사냥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동물들이 고통없이 빨리 죽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다.
우리는 개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으며, 백인들이 우리 영토에 풀어놓은 토끼를 사냥해 먹거리를 해결했다. 돈이라곤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사냥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려 할 때, 간혹 성냥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가늘고 단단한 나무 막대기를 부드러운 막대기의 구멍 속에 박고 손 바닥으로 비비면 되기 때문이었다. 부족의 어른들도 즐 그런식으로 불을 지폈다.
우리가 잡은 동물들은 어떤 깊고 신비로운 차원에서 영적인 세계의 인도아래 우리 손에 잡히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의 먹이가 되어 주기 위해 스스로 우리 앞에 나타나 자신을 희생하는 모든 동물들을 우리는 늘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대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 고기잡이를 나갔던 아이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우리는 서로 수확물을 나누어 가져갔다. 내 친구들과 나는 부족의 모든 가족들이 충분한 음식을 먹도록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 모두는 서로를 걱정하고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었다. 물고기를 잡으러 떠난 아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원주민의 원칙에 따라 새끼 물고기는 더 자라서 번식하도록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였다. 물고기가 다 성장해서 누군가의 적절한 식량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였다.
어른들은 기다란 나뭇가지를 잘라 불에 달구어 창을 만들었다. 삼지창을 만들고 싶으면 더 날카롭게 다듬은 나무 꼬챙이 두 개를 캥거루나 에뮤의 힘줄로 단단히 묶은 뒤 약간 작은 나무 막대기로 끝부분을 벌려 놓으면 되었다. 어른들이 종종 한 움큼의 벌레를 캥거루 힘줄로 둘둘말아 공처럼 만들어 주면 우리는 그것을 물속에 넣고 살살 끌고 다녔다. 그러다 물고기나 뱀장어가 벌레 뭉치를 삼키려고 입을 크게 벌리면 얼른 잡아당겨 낚아 올렸다.
해가 거의 질 무렵 우리는 사냥감을 갖고 야영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들은 곧이어 저녁을 짓기 시작했고, 내일을 위해 먹을 것을 남겨 두는 걸 잊지 않았다. 딱딱한 열매, 뿌리, 씨앗, 고구마 등을 한데 갈거나 밀까루를 섞어 댐퍼 빵을 만들기도 했다. 누군가 아파서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양철 주전자에 맛좋은 스프를 가득 끓여 그를 찾아가곤 했다. 모두가 서로를 위해 그런 나눔을 실천했다. 힘든 때일수록 서로 의지하고 가능한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한 날 밤이면 야영지의 젊은이들은 바깥에 모닥불을 피웠고, 부족 사람들 모두가 그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불렀다. 보호구역 안의 교회에서도 수요일 밤마다 노래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이 되면 사방에서 부족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노인들은 음악을 연주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최근에 이 대지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 노인들이 위대한 원주민 사냥꾼들과 운동에 능했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4. 얼굴 흰 침입자들
어망을 놓는 동안 노인들은 오래전 볼락호주에서 보낸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호수는 우리마을 서쪽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가을철 우기가 되면 수많은 뱀장어들이 떼지어 호수에서 바다로 헤엄쳐갔다. 호수 주변의 모든 땅은 불룩바라부족의 소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허락없이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가을이 되면 그들 부족은 다른 부족을 반겨주었다. 샛강을 따라 부족마다 물고기 잡는 구역이 정해지고, 부족들은 해마다 그곳으로 들어가 뱀장어를 잡을 수 있었다. 부족들은 그들 소유의 구역을 표시하는 바위 옆에서 두달동안 야영을 하며 강에 뱀장어 잡는 망을 깊이 드리웠다. 그때가 바로 성대한 잔치를 여는 때였다. 지혜의 말들이 오가고 코로보리 춤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결혼 준비가 진행되고, 옛 친구들과의 반가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때로는 식량을 저장하는 일이나 이웃 부족에 관한 중요한 대화와 결정들이 오가기도 했다. 부족의 어른들은 한데 모여 조상의 영혼들로부터 안내를 구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 만장일치로 결정하려고 늘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1860년대 초반부터 한 무리의 얼굴 흰 사람들이 가을장마가 시작되자마자 호수에 나타났다. 이때는 호수의 물이 넘치고 뱀장어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다. 그 백인들은 단 하나밖에 없는 수로 전체에다 촘촘한 그물을 설치하고 원주민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모든 물고기를 자기들이 독차지하겠다는 심보였다. 그렇게 해서 군디츠마라(원래부터 이 땅에 산 사람들) 국을 형성했던 남서쪽 다섯 원주민 부족의 대회합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나는 또 누라트 산에서 열린 특별한 원주민 모임에 대해서도 들었다. 각기 다른 방언을 가진 부족들이 보름달이 뜨면 빠짐없이 그곳에 모였다. 아이들까지 다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노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했다. 그들의 땅 어디가 약탈당했으며 부족 사람들이 어디서 학살을 당했는지, 백인들이 큰 말과 총을 들고 어떻게 야영지로 급습해 왔는지를 이야기했다. 한 원주민 남자가 차에 질질 끌려가다 죽음을 맞이한 사건도 전했다. 그 남자는 차에 끌려가면서 백인들의 잔인함을 소리쳐 나무랐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웃어댈 뿐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모닥불 주위에서 행해졌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부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해안을 따라 북쪽마을들에서도 왔다. 해안 아래쪽에서도 또 다른 모임이 열렸다. 그때 생긴 조개 무덤들이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 아이들도 모두 그 자리에 참석해 어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방식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배웠다.
나는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 중 배가 고픈 나머지 양 몇마리를 훔친 사람이 있었다. 백인들은 복수를 하기위해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그 일에 함께 참여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들은 누가 주인인가를 보여주기위해 닥치는대로 죽이고 무고한 원주민 아이들을 붙잡아 해변에 데려가 모래사장에 목만 나오게 파묻은 다음 어린이들의 머리를 돌아가며 발로 찼다. 심지어 누가 머리를 멀리 차는지 시합을 벌였다. 희생자의 어린 형제들과 누이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기가 죽을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백인 하나가 부족 사람들을 초대해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다음 번에는 많은 부족민들을 데려오게 한 다음 음식 속에 스트리키니네 신경 흥분제를 넣어 집단으로 독살 했다고 한다. 내 할아버지도 그곳에 갈 것을 권유받았는데 할아버지는 백인들의 독살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아서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부족 사람들이 모이는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찾아 나섰는데, 그들이 백인의 목장 근처에 처참한 광경으로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한다. 백인 농장주는 그 땅을 원했던 것 같았는데 안심하고 그 땅을 차지하기에는 우리 부족이 너무 가깝게 살고 있어서 동물들에게 덫을 놓은 방법으로 우리 부족사람들을 유인해 독살시켰던 것이다.
인간은 그런 종류의 광기, 탐욕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인간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대해서는 안된다. 내 백인 친구인 카밀라는 나 대신 그 학살 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공무원들이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을 카멜라에게서 압수했다. 백인들이 한 일은 사실을 은폐하고 끝까지 부인한 것밖에 없다. 내가 기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5. 덤불숲을 떠나 문명세계로
대 공황기에 원주민 보호구역에 배급이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도처에 굶주린 사람들이 있었고, 목장주들조차 일을 맡길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는 도시로 갈 것을 결심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우리가 살던 집 근처에 원주민들이 빠르게 몰려와 원주민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원주민들은 학교에 다녀봤자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가족에게는 내가 벌어오는 서너푼의 돈과 음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열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발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공장의 화학약품 때문에 온종일 두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어느때는 백인 할머니 집을 청소해 주기도 했고 푼돈을 받고 노인들의 심부름을 해주기도 했다.
백인중에는 원주민을 이해하고 친절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원주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했다.
여기저기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먹는 것을 거를 때도 많았다. 그때 거리의 여자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인정은 잊을 수가 없다. 당시엔 그녀들이 매춘부라는 말을 듣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 뜻을 안 것은 훨씬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손가락질 했지만 우리에게는 천사였고 더없이 다정한 친구였다.
6. 빼앗긴 대지의 노래
어머니는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때가 되었다고 여기자 우리들에게 지난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 2만년 전, 바닷물이 불어나면서 타즈메니아 섬이 호주 본토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바다는 늘 폭풍우가 거세어서 원주민들을 해협을 건널 수가 없었지. 그래서 우리 부족은 본토의 부족과 많은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 180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해협을 건너왔다. 어머니의 외가쪽 추장은 망가니 추장이었는데 그들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백인들이 총과 칼을 무장하고 덮쳤어. 그때 대부분의 남자들은 죽고 여자들은 백인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추장의 딸인 트루가니니는 살아남았지만 그녀가 19세때 결혼했는데 배를 타고 섬의 집으로 갈 때 그 남편 역시 백인들에게 속아 죽게되고 그녀는 못된 일을 당했다. 그 후 트루가니는 죽은 남편의 딸을 낳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딸인 루이자를 어느 원주민 가정에 맞겼다. 그리고 자신은 백인 무역상과 동행하면서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 평화를 실현하는데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어. 그러나 그녀는 정치범으로 몰리고 결국 추방당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안타깝게 돌아가셨지. 백인들은 트루가니니를 원주민의 마지막 여왕이라고 여기고 그녀의 두개골을 맬버른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그녀의 딸이자 너의 증조할머니인 루이자는 어렸을 때 백인 물개잡이에게 납치되었다. 그 물개잡이 남자는 바스 해협의 작은 보호섬으로 루이자를 유괴해 갔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끌려가 노예가 된 원주민들이 숱하게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백인들은 그런 사실을 송두리째 부인하고 있어.
백인 남자들은 자신들이 납치해 온 여자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매년 여섯달을 보냈어. 폭풍우 거센 바스해협의 이 섬 저 섬에서 실어온 여자들이었지. 이 무법자들은 해적이고 물개잡이들이며 고래 사냥꾼들이었어."
그 중 물개잡이인 조지 브릭스란 사람이 섬 전역에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는 책임감있고 능력있는 뛰어난 선원이었지. 그런데 그 조지 브릭스가 원주민 추장의 딸을 납치했는데 그녀는 워레테르모테에너이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 존 브릭스이다. 이 존 브릭스가 나의 할아버지이고 그가 결혼한 여자가 바로 너의 증조할머니인 루이자란다.
모든 영의 세계가 우리 원주민 여자들과 그 자식들에게 일어난 일들로 통곡하고 있단다.
어쨌든 바스 해협 부근에서 무역을 하는 백인 남자들은 이런식으로 여러 섬에 원주민 여자들을 가둬놓고 자신들을 위해 계속 일하게 했어. 그러다가 아이를 낳으면 대개 바다에 던져 버렸지. 강간의 결과였지만 어떤 아이들은 낳아서 키우기도 했어. 어떤 남자들은 물개가죽을 충분히 마련해 놓지 않는다고 여자 노예들을 거꾸로 매달아 때리곤 했지. 그들은 그런 식으로 부족의 식량인 물개들을 다 잡아갔어. 여자들과 함께 말야. 그리고 마침내 돈을 벌 물개가 바닥나자 원주민 여자들과 가정을 꾸리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지. 그후 그들은 백인들과 작은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다. 물개들이 바닥나자 그들은 머튼새를 잡으며 살 게 되었지.
이무렵 루이자 할머니의 부족 사람들에게 끔찍한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그 당시 머튼새를 잡기위해 밖에 나와 있었는데 수많은 원주민들이 백인 선원들에 의해 바닷가 절벽으로 무리지어 끌려가고 있었어. 그때 한 백인이 소리쳤어. '뛰어 안뛰면 쏜다.'
많은 배들이 절벽 아래 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한편에서는 백인들이 자신들이 데리고 살던 여자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웃고 떠들었지. 부족 사람들은 배에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그들의 손을 자르고 물에 빠뜨려 죽였어. 바닷물이 온통 붉게 물들었지.
그때 우리들의 조상인 조지 브릭스는 존 브릭스와 함께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학살에 참여하기를 원치않는 백인들을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배를 저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때까지 죽지 않은 사람들을 꺼내어 본토로 쉼없이 노를 저어가게 되었단다. 그곳이 바로 빅토리아 주이지. 그렇게 우리 외가는 혈통을 다시 이어가게 되었단다.
루이자 할머니 부부는 호주 본토로 건너온 뒤 금광지대에서 일하다 양치기로 일하기도 하다가 후에 원주민 보호구역에 들어가 간호사이자 산파가 되었다. 그 후 원주민들의 대변자가 되어서 모두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후 이 원주민 보호구역이 원주민들에 의하여 비옥한 땅이 되면서 다시 할머니는 쫓겨나게 되었다.
7.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백인들은 아이들을 납치해서 고아원에 보내거나 입양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이 사는 방법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집에 냉장고가 없으며, 먹을 음식이 없어서 굶어 죽느니 고아원에 보내거나 입양을 하는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 한 듯하다. 그러나 부모의 허락없이 강제로 끌고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린이들은 덤불 숲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백인들은 원주민의 인격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에게 맞는 삶을 강요해왔다. 인디언 학교는 입양이나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중간귀착지나 마찬가지였다. 경찰과 가정복지부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학교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아이들을 무작위로 뽑아 강제로 끌고갔다. 원주민들은 아이들이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리를 죽는날까지 떠올려야 했다. 나의 가족은 다행히 끌려가지 않았으나 내 손자중 한 아이가 납치되었다. 손자의 이름은 린든이었는데 생후 몇 달만에 납치되었고, 부모의 끈질긴 노력으로 그 아이가 영국의 한 가정에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스무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생의 중반기에 나는 몇차례 감옥을 들락거렸다. 죄목은 내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이거나 아니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누명을 썼을 때가 더 많았다. 어느날 누가 코트를 훔쳤는데 경찰이 나더러 범인이라고 지목하면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했다.
" 잘 됐지 뭐. 누군가 따뜻한 코트 한 벌이 생겨서 기뻐하겠군."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가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원주민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원주민이기 때문에 온갖 부당한 일도 받아들이고 흐름에 순응했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를 위해 싸워줄 변호사도 없었다.
원주민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무시하고, 위축시키고, 원주민이 감옥에 가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리는 것이 백인들의 정책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이 사악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원주민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날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해 배웠다.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안내하고 경고를 보낸다고 우리는 배웠다. 백인들이 기독교 사상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간직하고 살았다.
원주민은 사람의 영혼을 매우 가깝게 느낀다. 그리고 어떤 존재들은 영혼의 세계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그것이 원주민의 전통이가. 원주민이라면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종종 우리의 꿈속에 나타나 메시지를 전하고, 친구나 친척이 아프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한다.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영혼들의 세계에서 보낸 중요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원주민들은 이것을 전 생애동안 민감하게 자각하고 살지만, 백인들에게 떠들지 않는다. 절대적인 진실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말했다가 비웃음을 살까 두렵기 때문이다. 거기 무언가가 있다. 원주민은 과학자나 학자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사실이다.
보호구역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는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 백인들 세계에서 살 때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그들의 삶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암시는 꿈이나 새 같은 외부의 것들을 통해서 온다.
진정한 원주민들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다. 누군가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늘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 절대 우리 부족의 땅을 떠나서는 안된다. 이 대지는 우리 영혼의 땅이야. 이 대지는 너의 조상님들과 나의 모든 것이었어. 내가 한 가정을 일으킨 좋은 터전이었다. 이곳은 영혼의 장소다. 우리가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과 하나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다오."
아버지는 원주민인 내 삶의 영적인 면을 신뢰하고 싶으셨던 것이고, 나는 임종을 맞이하는 아버지 앞에서 결코 부족의 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대로 나는 오늘날까지 온갖 비극을 겪고도 이 땅에 남아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과 더불어 산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어떻게 하는가를 우리는 안다. 우리는 행복뿐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눈다.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당연한 일부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간호사는 아버지의 주검 옆에 지켜보고 있던 나를 보고 경악을 했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우리와 백인들과의 문화의 차이일 뿐이다.
어머니는 백세 가까이 사셨다. 그리고 평화롭게 생을 마쳤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셨다. 그리고 날마다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어머니는 모두를 편견없이 공정하게 대하려고 늘 노력하셨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인종이나 종교는 따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돕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리고 모든 원주민들의 권리회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싸웠다.
어느날 밤, 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우리는 꿈을 통해 많은 메시지를 받는다. 원주민 전통에 따르면 흙탕물 꿈은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 꿈에 아내가 흙탕물 속에 가라앉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내는 바닥에 쓰러졌고 구급차가 오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우리 모두가 영혼들의 세계와 연경되어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 게 되는 것이다.
8.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
우리는 거의 날마다 백인들을 용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원주민들과는 달리 공손함이라는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종이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다른 이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한다. 그것이 원주민들의 삶의 원칙이다. 세상은 하나이며, 인간 모두가 한 가족이다. 모든 인간이 같은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문화는 다르지만 한 가족으로서 같이 웃고 대화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 인종 차별이나 편견의 벽을 허물고 누구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너나 할 것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우리 원주민들은 세상 만물을 신성하게 여겼다. 또한 대지를 어머니로 여겼다. 어머니 대지는 자식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았고, 우리 역시 어머니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를 알았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땅을 제멋대로 파헤치면 어머니 대지가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땅에 해가 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병들어 죽어 버리면 대지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자연에 기대어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마음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려고 서로 다투거나 돈에 자신을 팔아 버리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원주민은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물론 원주민들도 부족간에 전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투는 금방 끝이 났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은 끝도없이 계속된다.
젊은 시절 원주민들의 소망은 많지 않았다. 마음이 열려있고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백인을 한 명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 원주민들은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법에 저촉됨이 없이 분노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링 위에서 권투를 하는 일이었다. 링 위에서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고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많은 원주민들이 권투를 선택했다.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세상의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에 대해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라.
" 난 당신의 친구예요. 당신의 문화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나도 우리 문화에 대해 말할게요. 그러면 우린 서로 친구가 될 거예요."
결코 싸우거나 화내지 말라. 화낸다고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폭력을 사욯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윈(호주 노던 테리토리주의 중심도시)에서 열린 세계 원주민 회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비롯 캐나다, 브라질, 필리핀, 하와이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원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돈에 눈이 어두워 대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인들의 행위로 원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세계 어디서나 차이가 없었다.
1987년 5월 마침내 호주 정부는 덤불숲에 대한 공식 관리자격을 원주민 부족의 어른들에게 부여했다. 내 아들들과 많은 원주민들이 무려 16년이나 노력한 덕분이다. 원주민들은 지난 2백년간 온갖 거짓 약속에 속아왔다. 마침내 땅에 대한 권리를 되찾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 원주민과 원주민의 정신세계에 큰 변화의 바람을 불어다 줄 것이다.
새들의 울음이나 행동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험을 예고한다. 모포크(올빼미 모양의 새 이름)가 고함을 지르면 좋지 않은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 손녀가 자동차사고로 죽을 때도 역시 모포크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에 손녀가 죽은 것이다.
원주민의 종교는 나날의 삶 속에, 매 순간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삶 자체가 종교다. 우리 원주민들에게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느낌이 곧 종교다.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되고 나도 그 사람의 친구가 된다. 문명인의 사회는 이런 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멀어져 가는 그것들을 다시 되찾고,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 어디를 가든 아이들은 제멋대로 자라고 걸핏하면 폭력적인 싸움에 휘말린다. 그 결과 사람들은 눈만 뜨면 전쟁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의 방향을 잡아 줄 공동체의 어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겻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아버지 또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친부모일 필요는 없었다. 조부모나 친척이 보호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고, 삼촌이나 고모, 이모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원주민 아이는 절대로 버려지는 일이 없었다. 백인들의 고아원에서 자랄 때 조차도 원주민 아이들은 서로를 돌보았다. 원주민들은 공동체에 모여 살면서 부족의 어른들을 존중하고 어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 부족의 어른들은 원주민 공동체에서 신뢰받는 일원이 되는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먼저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백인 정부는 과거에 우리에게 일어난 불행하고 끔찍한 일들을 바로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난데 없는 정치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쫓는 원주민 출신 정치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젊었을 때 백인사회에 정착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백인과 똑같이 교육받고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이 백인에 가까웠다. 이들은 이제 원주민 관리자로서 안정된 직장을 차지하고 원주민 사회의 지도자인양 행세하고 있다. 그들은 원주민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부에서 보조금을 타내려 부족의 땅으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가로챈 사람들이다. 진정한 원주민들은 여전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그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함께 나눠먹고, 함께 생활하는 진정한 원주민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제 원주민은 이 지구상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숲은 원주민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이곳은 원주민의 영적인 장소다. 나의 고향이자 내 조상과 부족 사람들의 뼈가 흙을 껴안고 있는 곳이다. 원주민의 혼 그 자체와 다름없는 곳이다. 내 부족 사람들은 이곳에서 삶을 살았고, 계절마다 이곳을 방랑했으며, 이곳에서 노래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동식물의 씨가 마르고 물웅덩이가 어러워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기가 지나면 미련없이 다른곳으로 이동했다. 그럼으로써 다음 계절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변함없이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였다.
나는 이 숲에서 정치적인 머리싸움이나 과격한 행동없이 다만 평화롭게 살고싶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도 숲에 대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숲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싶다.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서평을 본 홈페이지 예화용어 - 역사이야기 -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22번)에 올렸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요약 원문: http://home.naver.com/lbd102/ (草岩)
[출처] 대지를 지키는 사람들 요약|작성자 lbd102
'[✿공지사항✿] > 지역사회봉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구두닦이 목사 김정하 (0) | 2013.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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