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 "
항구적인 마음의 평화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한쪽으로 더 치우치면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으로 향하여 앉아서 명상하는 일에만 너무 치중하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데 소홀하다면, 똑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외부의 '현실 세계'에서 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 세계로만 움츠러 들 수도 있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불균형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유의해야 할 4가지 측면이 있다. 만일 이 4가지에 동등한 비중을 둔다면, 자연스럽고 쉽게 발전해 가는 중에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4가지 측면이란 ,알기(knowing), 존재하기(being), 되어가기(becoming), 주기(giving)이다.
'알기(knowing)'란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기초적인 사실, 즉 나는 영혼이다, 나의 진정한 품성은 평화이다, 나에게는 마음과 지각 그리고 잠재의식이 있다 등이 주어져 있다. 이제 이들을 모아서 함께 맞추어야 한다. 이 사실들은 조각그림 맞추기의 조각들과도 같으므로, 정확하게 짜 맞추어야만 올바른 그림이 나타난다. 각각의 조각들은 작은 한 부분의 모양만을 담고 있어, 그 자체로는 완성된 그림에 대한 힌트만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정보들을 천천히 읽고 처리해 나가면서 우리의 인생살이에 맞추어 볼 때, 일관성있는 시야를 얻게 된다. 일단 이해가 있으면, 나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완성될 그림을 이해하면 하나 하나의 조각 그림이 어디에 위치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지각이 명료하게 유지되어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지식이 있으면 긴장이 예상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초연할 수 있다.
'존재하기(being)'는 요가, 즉 명상에서의 경험을 가리킨다.
배운 지식의 조각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해도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실제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헝가리어의 간단한 구절을 배워 올바른 순서로 반복할 수 있다 해도, 선생이 그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구절은 나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평화', '사랑', '영혼', '초연함'과 같은 단어들을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게 되는가? 오로지 체험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 '평화'라는 단어를 실재(實在, real)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는 평화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바탕이 된다. 왜냐하면 단어와 경험이 일치할 때에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이론적인 지식을 실제로 경험할 때, 그 지식이 검증되는 것이다.
경험은 지식에 대한 신뢰를 만들고, 이러한 신뢰감과 진리에 대한 분별력으로 인해 기초가 굳건히 다져진다.
'되어가기(becoming)'는 행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바로 앞에서 지식과 경험 간의 조화가 강조되었다. 거기에 모순이 있으면 지식에 관한 신뢰와 확신은 사라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 있어서도 조화는 극히 중요하다.
앉아서 명상하는 중에 자신을 평화로운 영혼으로 경험한 직후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평화로운 경험은 무의미해지며 영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에 빠져든다.
명상은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즉 명상에서 얻은 긍정적인 힘이 행동에 반영되어야 한다. 나는 실제로도 명상 중에 경험한 존재가 되어 가야 할 것이다.
명상의 결과를 현실에 옮기는 것은 대개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할 일이다.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지각 그리고 잠재의식의 사이클을 통해 영혼이 행동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명상 중에 평화로운 산스카라스를 만든다 해도, 이미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던 비평화적인 잠재의식이 계속해서 마음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는데 때로는 그것이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분별하여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각을 통해 의식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필히 이해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 부정적인 행동과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명상 중의 경험이 아무리 좋아도 행동이 이 경험과 상반된다면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평화의 보금자리가 되는 대신에 부정적인 생각과 계속 싸워야 하는 싸움터가 되어 버린다.
'주기(giving)'는 다른 이들과 조화롭고 이타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의 마음이 평화로우면 타인과의 관계도 자연히 좋아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 속에 비평화적인 불꽃을 당기는 것이 주로 타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우호적으로 베풀 때에는 나도 우호적으로 베푸는 마음으로 되기란 쉽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좀 거북하다고 느끼는 상황으로부터 시작해서 공공연한 적대적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에게 주는 일을 실천하면 나에 대한 보호책이 된다.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불행한 다른 영혼에게도 도움이 된다. 나는 주고 받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평화와 호의를 퍼뜨리겠다는 생각만을 갖는다는 것은, 공포나 원망으로 응하거나 내 마음 속에 분노를 일깨울 수 있는 여지조차 없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직면하게 되는 좋지 않은 상황은 나에 대한 시험과도 같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진정 알 수 있다. 거기에서 승리하면 지식을 얼마만큼은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확인할 수 있다. 만일 화가 나거나 부주의해지더라도 '다음에는 올바르게 행동해야지'라는 욕구가 있으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다시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때때로 자신의 긍정적인 경험을 나눔으로써 남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때 자신의 말로 설명해보면 내가 얼마만큼 이해했는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식을 되돌아 갈 때마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 간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발전해 간다.
주는 일은 보답이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행해져야 하고, 단지 내가 내 것으로 만든 긍정적인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동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줄 때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이 나의 긍정적인 행동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보답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주는 행동은 진실로 이타적인 행위이다. 내가 꽤 오랫 동안 명상을 연습하면, 주는 일은 언어를 초월한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즉 지식과 명상 경험이 나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단지 긍정적인 참된 자신의 모습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평화와 미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알기, 존재하기, 되어가기, 주기라는 네 가지 측면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룰 때, 영혼은 자연히 평화 가운데 머물며 타인과도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의 영혼의식 상태를 '생에서의 자유(freedom of life)'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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