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게바라의 예언
If you tremble indignation at every injustice then you are
a comrade of mine - Che Guevara
체 게바라는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쑥맥이었다.
그러나, 뭇여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게릴라 전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전사들이 개선할 때까지 일다(게바라의 부인)는 딸 일디타와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었다. 1959년 1월 21일 두 모녀는 아바나에 도착
했다.
게바라를 만나기 위해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아바나로 온 것은 1959년 1월 21일이었습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와는 엘 페드레로 전투에서 서로 알게 되었답니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두사람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외에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1959년 5월 22일에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했고 그는 6월 2일에 재혼했습니다."
- 일다 가데아 <체게바라, 투쟁의 나날>(1972)
다른 여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22세의 쿠바인 교사,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7.26운동연합"의 일원이고, 게바라와는 엘 페드레로 농장의
전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게바라부대에 합류하여 승리의 날까지 그의 곁
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 수행했다.
게바라는 재혼한 알레이다와의 사이에 네자녀를 두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부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다.
지금도 쿠바의 아이들은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말이 재미있다.
"체 게바라 사령관은 우리 같은 아이들을 많이 사랑했대요.
그래서 우리도 체 게바라 사령관을 사랑해요."
게바라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혁명가는 결혼생활에 실패한다.
남편의 인생이 혁명과 함께 진행되므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게바라는 우루과이에서 후에 "게바라의 예언"으로 이름 붙여진 두가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 중에서 케네디의 "진보를 위한 동맹"의 속셈을 폭로하고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 케네디 대통령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체 게바라와 케네디는 둘다 쿠바산 시가를
무척 애용했다고 한다. 차이가 있었다면,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고,
게바라는 쿠바산 시가보다, 쿠바의 가난한 민중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아래는 게바라의 예언중 일부분이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삶의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론 디시대통령과 회견하고, 다시 브라질로 가서 쟈니오구아 드로스 대통령으로부터 공식적인 훈장을 수여받았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 Che Guevara Hasta Siempre Soledad Bravo version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해군을 파견하여 쿠바를 봉쇄했다.
후루시초프가 소련 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할 때까지 봉쇄는 계속되었다.
1962년에서 1964년 이 3년 동안은 게바라에게 있어서나 모든 쿠바인에게 있어서나 매우
격심한 노동의 나날이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당과 대중조직을 견고하게 꾸미고, 향후 경제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1963년 7월, 게바라는 경제계획 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관리들과 경제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과연 늙은 공산주의자들이 게바라의 노선을 받아들였을까?
고참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게바라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을 노골적
으로 경멸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던 공장자주 관리방식이나 국가계획 경제가
골간이 되는 소련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도, 정신적 자격(刺激)을 중시하고 통일적인 예산
융자제도를 취하는 중국형 사회주의 방식을 더 선호했다.
게바라와 소련의 동지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나 서로 상대방을 비꼬는 좋지못한 평이 오고가고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바라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
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당내 논쟁에 있어서도 게바라의
동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경제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했다.
다양한 체험이나 생각들을 받아들여 가면서.....
한편에서는 혁명의 원동력이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시킬 당이
만들어졌다.
게바라에게 있어서는 두번 다시 맡기는 힘든 어려운 일만 계속
되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엔 혁명적 과업의 완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도사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주위에서 염려했던 대로(왜냐하면 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큰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레닌도, 카스트로도, 아니면 예수일지라도 그런 경우라면 그와 같이 실천했을 것이다...
여하튼, 쿠바경제는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러쿵 저러쿵 헐뜯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 게바라의 노선에 따라서......
1965년 그러나 게바라는 경제학자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쿠바경제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 주지만은 않았다.
1965년 1월, 그는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콩고, 기니아, 가나, 다오메이, 알제리, 탄자니아. 그리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알제리에서는 "제2회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이 연설에는 그의 울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처음의 순수한 열정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민중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실망한 체 게바라는 가슴속에 분노를 가득 안고,
3월 14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와서 피델 카스트로와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밀담을 나누었다.
그후 직장으로 돌아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마치 먼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쿠바혁명때 사용했던 권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1965년 4월 중순, 홀연히 게바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청사에도 사탕수수밭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요하는 쿠바 민중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바라는 늘 혁명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이상없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실종에 대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피델과 싸우다가 죽었다, 도미니카에서 객사했다, 발작을 해서 멕시코시티의 병원에 감금
되어 있다, 소련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보냈다, 수도승이 되어 스페인으로 갔다,
반카스트로주의자 그룹이 미국으로 납치해 갔다.......등등
불가능한 꿈을 위해 다시 전장속으로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 Che Guevara
1965년 7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콩고에서 돌았다.
게바라가 어떤 쿠바인과 더불어 촘베의 용병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자녀들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였다.
그중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디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
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 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공부하여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며,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아빠가"
민중해방을 위한 게릴라군의 한 전사로써 게바라는 영원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념하고, 다시 전장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한 명언중에 이런 말이 있다.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 누구의 억압도, 속박도, 부조리도 없는 모든 민중이
평등한 세상, 기존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또다른
제 3의 길, 그가 가슴속에 가지자던 꿈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였기에, 이 꿈이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후에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그는 이 불가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믿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그를 대신할 새로운 게릴라들이 그 꿈을 이루어 줄 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민중 해방에 바치기로 한 체 게바라는 투쟁에 뛰어들기 위해 옛 벨기에령
콩고를 훈련장으로 택했다.
그후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리고 나서 최종 목적지로 볼리비아를 택했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면밀한 변장작전으로 대응했다.
구렛나루와 콧수염을 깍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헤어스타일도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변화시켰다.
그는 우루과이의 상인 아돌포 메나로 변장을 한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증명서도 준비했는데, 증명서에 쓰인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
훼르난데스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메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나는 볼리비아의 오지에 별장 하나를 갖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내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의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미 볼리비아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서 새로운
투쟁이 싹트고 있다.
혁명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위험하면 위험해 질수록 혁명의
싹은 무럭무럭 커나갈 것이다.
즉 한 나라의 해방 후에도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
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끝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 제3세계(A.A.LA)의 연대를 위해 발간된 기관지
트리 콘티넨탈지에 체가 쓴 메시지(1967.4.16) 중에서...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현대의 오랜 정치투쟁에서 잊혀진 대륙
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이라는 인민대중의 함성이 제 3세계 단합기구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해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임무란 범세계적으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발악적으로 등장한 세계 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 세계적인 연합전선을 통해서 이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점잖은 신사인 미국인들은 전쟁도덕에 있어선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투쟁만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투쟁을 준비하고 투쟁을 시작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런 전쟁이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두지배 계급은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해오고 온갖 폭력과 악선전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에서 실천된 것처럼 무장선전이라는 게릴라의 영원한 규범이 실행될
것이다. 즉, 총에 의한 선전, 적과 대치하여 승부를 거는 전투,
그 자체에 의한 선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위대한 교훈이 착취받고 있는 민중들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보다 어려운 임무에 대한 준비와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 저항할 준비가 가능해진다.
적이 있는 모든 지점까지 투쟁의 장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적의 집, 적의 휴식처까지도 전쟁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일초의 평온, 잠시의 휴식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미국 병사도 자신의 막사에서나 극장, 혹은 거리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없도록,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점점 더 그가 야수와 같이 행동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발광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 1967년 4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단합기구"
회의에서 대독된 게바라의 보고서
1966년 8월 :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 도착,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한 쿠바인 10명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같이 싸웠던 강인한 전사들)도 도착 완료.
1966년 10월 : 산타 크루스 근처에 있는 집을 입수. 약 15명의 볼리비아인과 조직을 형성.
볼리비아 공산당은 게릴라전에 동조하지 않음.
1966년 11월 : 체 게바라, 농촌으로 들어가 게릴라 활동의 준비 개시.
같은 날, 즉 11월 7일부터 저 유명한 <게바라 일기>를 쓰기 시작함.
"오늘부터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밤에 은신처에 도착했다. 여행은 비교적 순조로왔다.
변장도 아주 훌륭히 되었고 무사히 코챠밤바를 통과했다.
파충고와 나는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면서 두 대의 지프로 이틀간 돌아다녔다.
은신처 부근에 도착하여 일단 차를 멈추고, 한 대만 몰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혹시 코카인을 제조한다는 소문이라도 나서 근처 주민들의 주의를 끌게 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두우마이니라는 자가 우리 그룹의 화학기사로 일하게 된 것이 수상하다...." - 게바라의 일기 중에서...
게바라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 한 사람의 게릴라 전사가 겪는 인생의 희비극을 엿볼 수 있다. 동지의 배반, 낙심과 기쁨, 투쟁과 죽음 등...
체 게바라는 처음에 지형을 숙지하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게릴라들이 속속 도착했다. 1967년 3월까지 적과의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다.
이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브즈토스가 내방했었다.
경찰이 이 두사람을 취조해서 중요서류를 압수하고 그들로부터 게바라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드브레와 부즈토스는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 것이다.
4월1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 기지를 수색하면서 그 속에서 게바라의 사진을 찾아냈다.
이 정보를 넘겨받은 미국 CIA는 볼리비아에서 수색활동을 시작했다.
볼리비아의 음모
Is to fight, to die fighting - Che Guevara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고양이 목의
방울처럼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그 쿠바의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체 게바라가 있었다.
미 CIA는 그중에서도 피델과 체 게바라에게
상당히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일례로 피델 카스트로 한사람에 대해 무려 8번에 걸친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것과 체 게바라 한사람의 게릴라를 잡기 위해, 당시 최고의 정보기관 CIA가 총력을 기울였고, 미국이 자랑하는 특전대 그린베레의 게릴라전 특별 고문관들까지 파견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이 두사람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CIA의 보고서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두사람의 듬직한 동지를 가지고 있다.
한사람은 혁명의 도끼 역할을 하는 라울이고, 또 한사람은 그의 머리 역할을 하는 체 게바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체 게바라는 하루 속히 제거 되어야 한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에 두뇌로 건재하고 있는 한, 미국은 언젠가 그로인해 재앙을 맞을 것이다."
미국이 체 게바라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 와중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그 주역들은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그린베레), 그리고,
CIA의 앞잡이들이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민중은 쿠바의 민중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미국의 CIA와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 연대가
이루어 지지 않아 통일전선 구축에 실패한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예를들어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체 게바라는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
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
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달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는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둘로 나뉘어 행동했다.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로 게릴라를 나눈 게바라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2000명 이상의 병력과 20여명의 게릴라는 너무
큰 전력차가 있었다. 체 게바라가 아무리 게릴라전의 귀재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다.
3월 3일 : 게릴라,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군측 7명 사망, 4명 부상, 10명 생포. 게릴라들은 야영지를 떠남.
4월10일 : 이리피티에서 군과 전투. 군병사 10명 사망, 6명 부상, 쿠바인 게릴라 루비오 전사.
4월20일 : 정부군을 속이기 위해 무유팜파로 내려감.
그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있던 드브레와 브즈토스 두 사람이 체포됨.
게릴라는 길을 바꿈.
4월25일 : 정부군과 전투. 쿠바인 롤란도와 군측 병사 2명 사망.
항공부대가 지역 전체에 폭탄 투하.
5월 8일 : 매복하여 정부군을 기다림.
정부군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포로 10명(후에 즈봄만 석방).
게릴라 전원 병에 걸림.
5월30일 : 매복, 수색대 병사 3명 사망.
5월31일 : 다른 장소 매복, 수색대 병사 2명 사망.
6월26일 : 군과 전투, 수색대 병사 4명과 게릴라 도우미 사망. 게릴라 전체 인원은 24명이 됨.
7월20일 : 다른 그룹에 의한 매복. 군병사 4명과 게릴라 1명 사망.
7월27일 : 정부군과 전투. 4명 사망.
7월30일 : 군과 전투. 게릴라 라울 전사, 3명 부상, 군병사 6명 사망.
부상자가 속출하지만 약이 없었다.
8월26일 : 정부군과 전투. 사상자 없음.
8월31일 : 후위부대의 와나로 후퇴. 호아킨외 8명의 게릴라 전사.
9월26일 : 게릴라(게바라가 이끄는 그룹)에 대한 정부군의 매복 공격. 게릴라 2명 전사.
캄바와 레온은 적의 포로가 되었다.
10월6일 : 계곡에서 게릴라는 정부군 1천 8백명에게 포위됨. 도망갈 길이 없었다.
10월8일 : 운좋게 탈출한 세 명의 게릴라 중 한 사람이었던 베니그노는 게바라의 최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잠에서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
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
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
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 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체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4"체 게바라"의 최후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 - Che Guevara
입회인으로서 체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아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10월 8일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0월 9일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군은 총살을 집행하기 위해 하사관 세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그 중 마리오 테란을 선택했다.
테란은 차분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체 게바라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테란은 분노에 불타는 체 게바라 의 눈빛에서 자신이 임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 때 체 게바라는 그가 일을 끝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쏴! 겁내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
감히 체 게바라를 쏘지 못했던 심약한 볼리비아 병사는
오후 12시가 되고, 술까지 한잔 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직후 다시 다른 볼리비아 군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후일 마리오 테란은 라파스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1968년 4월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체 게바라의 사살을 확인하기 위해 미 국방부와 CIA는 총력을 기울여 움직였다.
여기서, 그의 사형에 대한 미 국방부와 CIA의 보고서 내용을 일자별로 잠시 요약해 보겠다.
미국방부 기밀 문서 1967년 4월 28일
미국 정부는 게바라의 게릴라부대를 볼리비아에서 제거하기 위해 파나마에 있는 미 8사단의
특수부대 소속 그린베레 16명의 최정예 요원과 CIA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볼리비아 제2보병
대대를 훈련시키고 체 게바라를 제거하겠다는 내용.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5월 11일
메모 형식의 이 보고서는 미대통령에게 체 게바라의 행적을 CIA가 계속 추적하고 있으며,
대통령에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인지 시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 9일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로 볼리비아부대가 체 게바라를 사살했다는 미확인 정보 내용.
백악관 문서 1967년 10월 10일
1967년 볼리비아 부대의 보고 내용으로 볼때, 10월 8일의 공세에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희생자들 사이에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내용.
백악관 보고서 1967년 10월 11일
이 보고서에서 Walt Rostow는 존슨 대통령에게 99%의 확신을 가지고, 체 게바라가 지난
전투에서 사살되었음을 확신한다고 보고한다. 또한 미국에 16명의 그린베레 최정예
요원들에게 훈련받은 볼리비아 제 2보병대대가 그를 코너로 몰았고, 그리고 그를 사살
했음을 보고한다.
미 국무부 보고서 1967년 10월12일
체 게바라의 죽음이 라틴아메리카와 미국 그리고 소련에 미칠 중요한 의미를 중심으로
지역 전문가가 만든 보고서이다.
백악관 기밀문서 1967년 10월13일
백악관은 체 게바라가 제거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정보국 CIA 기밀문서 1967년 10월 17일
CIA가 1966년 9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수집한 쿠바와 소련사이에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활동에 대한 불화와 이견에 대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이다.
볼리비아 주재 미 대사 핸더슨의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볼리비아주재 미 대사인 핸더슨이 본국에 보내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로써
체 게바라는 확실히 사살되었으며, 그 증거로 CIA요원의 감시 아래 두 손목을 잘랐으며,
시신은 비밀리에 빌라그란데 근처의 활주로에 매장 되었음을 보고한다.
볼리비아 제2보병대대의 훈련경과와 활동, 체 게바라의 체포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술한 보고서이다.
특히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를 쏜 볼리비아 병사의 보고가 흥미롭다.
체 게바라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은 "Know this now, you are killing a man"이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후에, 이 병사는 방아쇠를 당길 때의 심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그의 눈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고, 전 그의 눈에 매혹 당했죠.
나는 그 위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CIA 보고서 1967년 10월 18일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국민을 향한 연설을 번역. 1967년10월9일 12시 쿠바혁명의 주역
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39세를
일기로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
으로 막을 내렸다.
부르조아의 아들이었으나, 진정 민중을
사랑하여, 안락한 의사의 직업도, 국가
중앙은행 총재라는 명예도 쿠바의 2인자
라는 지위도 모두 포기한 채, 항상 민중과
함께 먹고, 함께 입으며, 억압에 대항하는
민중해방 전쟁의 최전선에서 투쟁했던 이
위대한 게릴라 전사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신화(神話)가 되어 쓰러졌다.
체 게바라의 죽음 이후, 최근까지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란 말이 새삼스럽게 와 닿는다.
체 게바라는 "산타클라라 전투의 영웅", "위대한 민중의 사령관", "전사 그리스도",
"20세기 최후의 전사", "최후의 게릴라"등등 온갖 미사어구가 난무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평가 받는
가운데, 또다른 쿠바혁명의 영웅 피델 카스트로는 이 재평가 작업
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견제와 미국과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소련의 압력은 피델이 조직했던, 체 게바라 구조특공대의 해체를 요구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굴복해 체 게바라에게 원조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체 게바라는 결국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볼리비아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과연 피델 카스트로는 위의 내용처럼 소련의 눈치를 보느라 쿠바 혁명의 둘도 없는 동지인 체 게바라를 버렸을까?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는 이미 체 게바라와 쿠바의 혁명을 이야기
하던 그가 아니다. 권력에 눈이 먼 또다른 독재자일 뿐이다...
쿠바의 대다수 민중들은 그때 왜? 피델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죽은 후에 그가 과연 체 게바라 만큼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피델을
믿었던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사형당하기 직전 그가 한 유언 내용이
"피델에게 전해 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직후,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구스만이라는 사람이 게바라의 최후 순간을
공개했는데, 당시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구스만은 체
게바라 등 생존 게릴라들이 억류된 마을로 파견됐다.
그는 게바라가 처형되기전 그와 장시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증인으로, 대화는 볼리비아 군인 수명이 둘러싼
작은 방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데 구스만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피맺힌 목소리로
"피델이 날 배신했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게바라는 혁명의 실패 원인에 대해 "쿠바와 볼리비아
공산당으로부터의 지원이 줄고, 당과 볼리비아 노동자
세력의 분열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데 구스만은 게바라에게 담배를 주었고 부상당한 체 게바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장화속에서 갈색표지의 육필로 쓴 소책자를 꺼내 구스만에게 건냈다고 한다. 진정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배신했단 말인가? 이 역시 시간이 더 흐른 후
"역사가 말해 줄 것이다."
어쨌든, 체 게바라를 쿠바민중들의 품으로 꼭! 찾아오겠다는 피델 카스트로의 약속은 지켜
졌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체 게바라를 살해한 볼리비아군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두 손목을 잘라 그를 사형
시킨 증거로 그의 친구 피델 카스트로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암매장했다.
그는 갔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들은 그에게 "최후의 게릴라"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틀린 말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체 위로 또다른 게릴라들이 민중을 위해 싸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Che Guevara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고, 그가 죽은지 30년만에 그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조국 쿠바로 돌아와 묻혔다.)
체 게바라 사령관이여! 영원하라!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야만의 세기라는 20세기가 저물고 또 다른 세기가 밝아오던 지난 1997년 여름
볼리비아 비야그란데의 공동묘지에서 한 무덤이 열리고 한 게릴라가 신화로 되살아났다.
그는 바로 체 게바라였다.
그는 죽어서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되살아났다. ◀◀◀(귀환하는 체 게바라를 환영하는 쿠바 국민들)
60년대 저항운동의 신화적 게릴라 체 게바라의 유해가 쿠바로
돌아오던 날. 쿠바의 모든 국민들은 이 위대한 게릴라의 귀향을 열렬히 환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쿠바의 모든 거리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라는 구호가 메아리쳤고, 체 게바라의 깃발이 넘쳐 흘렀다.
의사출신의 엘리트, 쿠바의 제 2인자의 자리를 박차고 있는
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전쟁터를 누빈 이 검은 베레모에 멋진 콧수염를 기르고, 열정적인 눈빛을 지녔던, 영웅이
그가 해방시킨 쿠바의 품에서 편히 잠들기를 빌면서...
거리는 온통 게바라의 모습으로 도배되었고, 그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중앙 방송국에서는 매일 체 게바라의 기록영화를 방영했으며, 그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들이 잇따랐고, Hasta siempre(음악듣기)와 같은 추모음악과 그가 생전에 남겼던, 저작들의 출판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것들이 아니다.
없는 자, 착취 당하는 자, 억압 받는 자들을 위해 싸웠던 그를 마음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열기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의 영웅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체 게바라는 나에게 성인이었어요.
이 세상에 체 게바라처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볼리비아에 체가 투쟁한 지역의 농민들이 집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와 함께 게바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는 예수와 같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59년 쿠바혁명 당시의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한 노인이 한 말이다.
왜? 그를 "전사 그리스도"라고까지 칭하는지 알게 하는 대목
이다.
체 게바라를 직접 대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체 게바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으며, 함께 노동을 했던 체 게바라의 모습은 가식
없는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의 영향력도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해 버리는듯 했다.
그를 직접 접해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그는 게릴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가 제국주의의 간섭을 타파하기 위해 주창했던, 게릴라전이 점점
세력을 잃어가고 있고, 그의 사상적 뿌리 마르크스 주의도, 동유럽 사회주의도 붕괴되면서
빛이 바래져 버렸다.그는 이대로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이 영웅이 없는 시대가 60년대의 영웅인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망 30주기를 맞이해 그의 영향력은 쿠바와 남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목숨을 잃은 볼리비아에는 유럽과 미국, 남미등지에서 성지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체 게바라가 66년 8월 볼리비아에 도착해서 67년 10월 최후를 마칠 때까지의 "게바라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한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학 교정에서 게바라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평등과 정의를 의미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져 본다.
과연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을까?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체 게바라는 행동과 사상을 일치시킨 특별한 사람이었다.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찾기가 힘들다.
나약하기만 한 현대인들에게 격동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체 게바라와 같은 영웅을 다시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체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우는 위대한 전사의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지금의 체 게바라는 현실적 폭발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잠재된 폭발력은 여전하다.
80년대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민중들이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들의 안락한 일상에서 떨쳐 일어났던 것처럼, 체 게바라 역시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력적이다.
"부자에게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우리나라의 의적 홍길동이 주장
했던 것과 같은 체 게바라의 목표는 아직도 부익부 빈익빈이 편재한 인간사회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변함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사상운동, 노동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형태로든 이 목표를 추진하는 이들에게 체 게바라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손을 잡아주는 믿음직한 동지로써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돌아온 영웅 체 게바라는 1990년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매장되었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체 게바라의
뼈만 남은 유해는 이날 마침내 쿠바혁명 전적지에서
영원한 안식를 취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군이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대첩 후 39년,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이며, 쿠바 정부가 지정한
체 게바라 추모 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게바라의 유해를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안치하고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쪽, 산타 클라라의
묘지로 옮겨졌는데, 아바나에서 산타 클라라에 이르는
행진 루트는 지난 58, 59년 그가 산타 클라라에서 대승
을 거두고, 쿠바 수도 아바나로 진격하던 길을 방향만
반대로 갈 뿐이었다.
10월17일 체 게바라 장례행사는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
으로 방영 되었고, 쿠바의 민중들과 그를 사랑한 이들
은 또한번 진한 눈물로 그의 최후를 배웅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가 32년 만에 자신의 조국에 안치 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었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비야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
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체 게바라 유해의 행방은 지난 30여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체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이렇게, 체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웠던 것은 비난을 우려한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를 조사팀에게 차단했던 탓도 컸다.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체 게바라의 시체를
비야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
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90년 6월말 드디어,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체 게바라는 두 손목이 없는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체 게바라의 죽음
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손목을 잘라 쿠바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체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정을 마치고, 혁명의 고향이자 전적지인 쿠바의 산타 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 체 게바라의 추모곡 중에 Hasta Siempre를
"베네수엘라의 보석"이자 저항가요의 기수인
Soledad Bravo가 리메이크한 곡이 있는데,
Soledad Bravo는 언제나 압제에 힘겨운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노래했었으며, 지금도
그들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는 진정한 영혼의 목
소리를 지닌 가수로, 체 게바라의 상징성과
Soledad Bravo의 민중가수적 이미지가 합쳐진
은 한대의 기타가 전해주는 애잔함과 Soledad Bravo의 애절한 절창이 어우러져, 체 게바라 추모곡 중에서도, 백미중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수십년전의 인물이자 머나먼 라틴 아메리카의 한 혁명가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불과 10여년 전의 우리 현실을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것 처럼 체 게바라 열풍
이 잠시 동안에 찻잔속의 폭풍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체 게바라는 충분히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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