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정복자와 응시,관찰]/전생여행관련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5, 6

가야트리샥티 2012. 11. 16. 17:53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5

전생과 윤회-5

 

윤회의 시작과 끝


윤회는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어디에서 끝나는가? 나는 언제부터 존재하며, 왜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 어디까지 가야 이 여행이 끝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볼 차례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답은 필자의 어설픈 설명보다는 부처님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공부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정확한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얻으실 때 사용했던 방법이 바로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이다.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하니, 우선은 내가 고해의 바다로 떨어진 이유를 알아야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인연이 있었음이다. 때문에 인연에서 벗어나야 윤회를 벗고, 윤회에서 벗어나야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연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인연의 시작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내 그 시작을 깨달은 석가세존이 이를 일컬어 무명(無明)이라 했다. 무명이란 말은 불교에서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십이연기법을 살펴보면 무명의 뜻은 최초의 인연, 즉 인연의 시작을 말한다. 석가세존이 십이연기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십이연기(十二緣起)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

 

        某靈靈駕 至心啼受(모령영가 지심제수)
        
汝從無始已來 至于今日(여종무시이래 지우금일)
        
無明緣行 行緣識(무명연행 행연식)
        
識緣名色 名色緣六入(식연명색 명색연육입)
        
六入緣觸 觸緣受(육입연촉 촉연수)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有緣生 生緣老死(유연생 생연노사)
        
憂悲苦惱(우비고뇌)

 

        모령의 영가들이여, 지극한 마음으로 받아 들여라.
        
그대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이 있었고, 행을 쫓아서 식()이 일어났으며
        
식이 일어나매, 명색(名色)이 생겼고, 명색이 생기니 육입(六入)이 갖추어지고
        
육입을 갖추므로 촉()을 느끼고, 촉을 느끼므로 수()가 뒤따르고
        
()가 뒤따르니 사랑()에 붙잡히고, 사랑에 붙들리니 취()하고자 하고, 취하고자 하니 가지게() 되고
        
가지게 되니 태어나게() 되고, 태어나고 나니 늙고 죽음이 따르고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있게 되었던 것이니라.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역관(逆觀)

 

        無明滅卽 行滅(무명멸즉 행멸)
        
行滅卽 識滅(행멸즉 식멸)
        
識滅卽 名色滅(식멸즉 명색멸)
        
名色滅卽 六入滅(명색멸즉 육입멸)
        
六入滅卽 觸滅(육입멸즉 촉멸)
        
觸滅卽 受滅(촉멸즉 수멸)
        
受滅卽 愛滅(수멸즉 애멸)
        
愛滅卽 取滅(애멸즉 취멸)
        
取滅卽 有滅(취멸즉 유멸)
        
有滅卽 生滅(유멸즉 생멸)
        
生滅卽 老死(생멸즉 노사)
        
憂悲苦惱滅(우비고뇌멸)

 

        무명을 없애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가라앉고
        
식이 가라앉으면, 명색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육입이 없어지고
        
육입이 없어지면, 축을 느끼지 못하며
        
촉을 느끼지 못하면, 수가 부질없고
        
수가 부질없음에, 사랑에 붙들리지 아니하고
        
사랑에 붙잡히지 아니하면, 취할 것이 없나니
        
취할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이 없어지고
        
가진 것이 없으면, 태어나지 않음이라.
        
나지 않으니, 늙고 죽는 일이 없고
        
근심()과 슬픔()과 고뇌(苦惱)를 멸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열두 가지 연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마음의 귀향-반야’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십이연기의 전체적인 의미, 그리고 연기론을 통한 윤회의 시작과 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연기법은 유식론(唯識論)과 더불어 불교 철학의 양대 산맥인 윤회론의 골자를 이루는 내용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야 말로 전생과 윤회라는 주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서적들을 보면 대개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필자가 앞에 그려놓은 십이연기도를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순관(順觀, 그림에서 시계 방향)과 역관(逆觀, 그림에서 시계 반대 방향)을 수도 없이 반복하신 끝에 마침내 육도 윤회의 비밀을 깨닫고 정각(正覺)을 얻으셨다고 한다.


십이연기법을 앞의 그림처럼 읽어나가면 바로 현대적인 풀이가 된다. 먼저 순관(順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생명이 육도 윤회하는 고해 속에서 고뇌 번민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니, 까마득한 옛날에 인연(無明)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인연이 생기니 그것에 반응하는 본능(; 부처님은 짐승들의 본능을 행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마지막 장에서 상세히 해설한다)이 생겼다. 본능이 생기니 이어서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이 생겼다.

 

이 분별심이 업이 되어 육체(名色)를 받게 되고, 몸을 받고 나니, 자연히 감각(六入 : 육경(六境)이라고도 한다. 여섯 가지 감각 또는 감각 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눈, , , , 신체, 의식의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이 생긴다. 감각을 갖추게 되니 나와 남으로 나누어져 만남()이 있게 되고, 남과의 만남에서 내 것이라는 집착()을 하게 된다.

 

집착을 하게 되니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되니 욕망()에 사로잡히며, 욕망의 불길은 소유()하게 만들어 마침내 소유()의 업이 뿌리가 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태어나고 나니 고뇌 번민을 떨칠 수가 없도다.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으로 육도 윤회의 이유를 알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십이연기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십이연기의 역관(逆觀)으로 윤회의 짐을 벗고 해탈로 가는 길을 알아보자.

 

"옛날에 이 몸을 있게 만든 그 인연(無明)을 없애면 인연을 따라 일어났던 본능()이 사라지고, 본능()이 사라지면 나와 너를 구별하는 분별()이 없어진다. 분별심이 업이 되어 받았던 몸(名色)을 벗게 되니 몸을 벗으면 육체의 작용인 여섯 가지 감각(六入)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니 나와 남의 나뉨이 없어 만남()이 없어진다.

 

남과 만나지 아니하게 되니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게 되고, 집착을 버리니 집착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가질 이유가 없다. 사랑을 하지 아니하니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니 소유()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니 태어나야 할 업을 짓지 않게 되고, 태어날 업이 없으니 태어남()이 없다. 이렇게 태어나지 않는데 무슨 고뇌 번민이 있겠는가?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출발하여 무명으로 돌아와 끝난다. 여기서 부처님이 무명을 모든 인연의 시작인 무엇으로 말씀하셨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명을 없앤다는 것은 인연의 원인을 없애겠다는 말이며, 소급해서 최초의 원인을 멸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무명이라 이름지은 인연의 시작은 무엇일까? 과연 최초의 인연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인과론(因果論)이란 한마디로, ‘모든 것은 선행되는 이유의 결과로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이유가 있다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인과론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이유는 아무런 선행되는 이유도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인과론적 우주인가? 거시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인과론적 우주가 아니다. 물질은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자의 세계는 분명히 인과론의 세계다. 분자의 생성은 반드시 그 선행되는 사건의 결과이고 분자의 이동은 반드시 인과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놓으면 떨어지리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인과론의 세계는 예측이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손에 쥐고 있는 물체를 놓았는데 이것이 공중으로 솟구칠지 밑으로 떨어질지, 오른쪽으로 날아갈지 갑자기 사라져버릴지를 예측할 수 없다면 이건 인과론의 세계가 아니다.

 

분자 이상의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예측이 가능하고 예측한 대로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원자 이하의 세계에 들어가면 갑자기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해지고 인과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원자핵을 싸고도는 전자의 움직임은 전혀 비인과적이다.


방금 있었던 위치가 다음에 있는 위치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전자는 허깨비처럼 그냥 여기저기 나타난다. 특정 지점에 있는 것을 관찰하는 순간엔 거기에 있지만 다음엔 어디에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미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이건 완전히 요술의 세계다.

 

미립자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 물리적인 존재란 특정 순간의 위치와 속도이다. 그러나 미립자들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다. 물질의 기본 단위인 미립자들이 전혀 선행하는 원인 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져서 소멸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이런 허깨비들이 쌓아올린 허상의 세계이다. 존재하지 않는 물질들인 미립자는 반드시 관찰자의 의식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그리고 관찰자의 의식이 그 미립자의 선행 원인으로 작용해서 미립자를 움직인다.

 

시공간이란, 비인과론적인 미시 세계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인 거시 세계를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계도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에서 출발해서 인과론적 조직된 정보인 영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인과론적인 낱낱의 정보들이 인과론적인 통합 정보(Set of Spirits)로 넘어가는 그 문지방을 찾아야만 인연의 출발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인연의 첫 출발점이 바로 무명이다.


미립자의 존재가 양자론으로서 파악할 때 공()이라면, 무명도 역시 공()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인 미립자들이 모여 만든 물질계가 결국 도달할 최종적인 특이점의 성격이 무()인 것처럼 정신계의 최종점이 될 인연의 끝인 해탈 역시 무(). 이 세계는 비인과론적인 세계인 무()에서 출발해서 인연의 세계를 거쳐서 결국 비인연의 세계인 공()으로 돌아가는 세계다.


물질의 시작이 공()인 것처럼 영혼의 시작도 공()이다. 따라서 우주 의식도 시작과 끝이 있고 윤회도 시작과 끝이 있다. 인연의 세계에서 벗어나 공()으로 돌아가면 윤회도 끝난다. 스스로 끝내지 못하면 억겁의 세월을 우주와 함께 유전하는 것이 의식이다.


유전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생명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누리지만, 괴로움의 순간은 더 길고 즐거움은 덧없으며, 끝없이 태어나는 업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 내가 태어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처럼 다음 생의 태어남도 거부할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성을 닦아서 인연을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 그 여행이 덜 피곤하고 덜 고통스러운 길이 되도록 예비하는 것뿐이다. 가능하다면 이 고통스러운 여행을 그만 두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다섯 번째 여행-전생과 윤회 6

전생과 윤회-6

 

윤회하는 여러 생의 자기


나는 수없이 많은 생을 아무 의미도 모른 채 반복하고 있는데, 어제 태어나 죽었던 나와 오늘의 나는 과연 어떤 관계란 말인가? 얼굴도 모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와 나는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오늘 내가 죽은 다음에 누군지도 모르지만, 내일 다시 태어날 어떤 사람을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량겁을 통해 되풀이될 생에서 지금의 생이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수천만 번 다시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이 한 인생에 얼마나 가치를 두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자칫 우리로 하여금 염세적인 패배감을 갖게 한다. 억겁 전생을 통한 윤회의 모든 경험이 하나의 세트로 저장되어 있고, 이승의 삶은 그것에 약간의 내용만 더해질 뿐이라면, 이 한 삶의 가치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그리고 이 한 생을 아무리 잘 산다 해도 수십억 년의 생 가운데 하나의 포지션(Position)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으로도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바꾸지는 못하리라는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성의 변화가 쉽지는 않지만 한 생의 가치 또한 그리 작은 것만은 아니다.


이 문제를 컴퓨터에 비유해 보자.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 프로그램인 MS-DOS①는 처음에 360KB②짜리 5.25인치 디스켓에 담긴 1.0버전(Version)③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1.44MB④짜리 3.5인치에 담긴 6.x버전이 나왔고, 곧이어 윈도(Windows)로 발전했다. 앞으로 50년 후에는 이 MS-DOS가 어떤 형태로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업그레이드(Up-grade)⑤되는 소프트웨어다. 지금의 생이 바로 최신 버전이다. 그 이전의 프로그램들이 버전별로 계속 수집되어 있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최신 버전이다. 마지막 버전은 사실 그 이전 버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용과 방식이 달라 보여도 그것에는 초기부터의 축적된 노하우(Now-how)와 개발 사상이 담겨있다. 그래서 누가 지금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운영 체계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윈도-98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MS-DOS 1.0부터의 전체 버전을 설명할 것이다. 원도와 도스가 전혀 달라 보이는 OS⑥라 하더라도, 윈도는 도스를 개발해오면서 축적된 기술과 사상의 바탕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또 다른 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워드프로세스 프로그램인 ‘아래아 한글’을 보자. 지금 소프트웨어 가게에 가서 아래아 한글을 달라고 하면 ‘한글 97’을 줄 것이다. 그게 한글이니까. 그런데 제일 처음 출시되었던 아래아 한글 1.0은 아래아 한글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도 아래아 한글이다. 그러나 3.0이 나온 지금 1.0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나는 나의 최신 버전이다. 죽고 나면 다음 생에는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겠지만, 이전 버전(Old Version)인 나의 바탕 위에서 업그레이드되므로 지금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최신 버전이 아닌 중간 버전이라면 나의 흔적은 나의 자성에서 희미한 정도밖에는 찾을 것이다. 중간 버전이란, 예를 들자면 아래아 한글 2.13 따위를 말한다. 내용이 아주 약간만 바뀐 버전이지만 이런 것은 대표성을 갖지 못한다. 게다가 실패 버전도 있다. 개발 도중에 실패해서 발표되지도 못한 채 사장된 버전들이다. 예를 들어 2.0을 가지고 3.0을 만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바로 4.0을 만들었다면 4.0이전의 대표 버전은 3.0이 아니라 2.0이 된다.


만약 태어나서 세살 때 홍역으로 죽은 경우라면, 이것은 실패 버전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전의 삶이 자기를 대표한다. 스무 살 정도에 죽으면 중간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런 삶은 자기를 대표하기 힘들다. 이 생을 어영부영 보내면 지금의 자기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중간 버전이 되고 만다.


내가 나의 전생을 떠올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정식 버전일수록 확실하게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대표성을 가질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삶들이 우선 떠오르고, 희미하게 살다 갔거나 어려서 죽은 삶들은 중간 버전 내지는 실패 버전으로 거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수천, 수만 번의 환생 중에서 유독 서너 개의 전생만 기억나는 이유도 그것이 나를 대표하는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삶들의 성격이 현재 나의 자성을 이루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생을 가장 파워풀한 최신의 버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럼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 존재일까? 얼굴도, 이름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어떤 사람을 자기라고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자아가 심히 불편하다. 기억나지 않는 두 살 때의 자기조차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어머니 뱃속에 있던, 인간이지도 않았던 자기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에 대해 강렬한 애착을 가진다.

 

만약 자기가 여든 먹은 노인이 되었을 때의 사진을 누군가가 보여준다면 그 사진 속의 노인이 자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게 되어 있다. 물론 여든까지 산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하자. 그 핏덩어리를 보여주면서 ‘이게 당신이오’ 하면 그것 역시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매 순간 그는 그때의 모습을 자기라고 받아들이면서 자기에게 한없는 집착을 보인다.

 

몇십 년 전 사진으로 미리 보여주었을 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노인이 막상 자기가 되고 나면 그때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그 모습의 자기에 집착한다. 그 모습의 어떤 사람만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자기일까? 전생의 어떤 사람이나 어렸을 때의 자기나 이미 지금의 자기와는 너무도 다른 존재이다. 다음 생에 환생했을 때의 어떤 사람이나 여든 노인이 된 자기나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자기와는 전연 다른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생에서 시시각각 변해버린 매순간의 어떤 사람은 자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생과 내생의 어떤 사람은 한사코 자기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들 전부가 매순간 변해 가는 자기이다. 이 말은 자기라는 고정된 정체성(Identity)이 없다는 말이다. 계속 변화하는 어떤 순간의 어떤 존재이지, 그곳에 불변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한 시간짜리 테이프에 담아 한번 돌려보라. 화면에는 제일 먼저 기저귀를 차고 우유병을 빠는 어린이가 보이고, 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보이다가, 그 다음에는 여드름이 숭숭 난 학생이 보이고, 어느 틈에 한사람의 어른이 보일 것이다. 잠시 뒤에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부모가 보일 것이다.

 

그 바로 다음에는 주름지고 등이 굽은 노인이 힘없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슬퍼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어떤 물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테이프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그 화면의 주인공 중에서 과연 누가 자기인가? 아무도 자기가 아닌가? 아니면 그 모두가 자기인가? 억겁 전생의 모든 나와 현생의 나와의 관계를 짐작해 보라.


불행한 노년을 보내는 한 노인이 탑골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자신의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조금만 더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아냐 결혼했을 무렵에도 늦지는 않았어. 그때라도 정신차리고 열심히 일했었어야 했어. 술과 여자에 그렇게 빠질 일이 아니었어. 내가 사십 고개에 들었을 때, 그 때도 늦지 않았어. 아직도 기회가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늦어버렸어. ! 왜 이렇게 살았을까… 바보처럼.


그러나 노인은 아직도 늦지 않았다. 늙고 추해진 그 옷을 갈아입을 때가 가까이 온 것뿐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 삶을 위해 깨끗하고 정정한 원을 세우는 데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후회하면서도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를 하는 데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이생에서의 모든 재산과 명예와 권력은 모두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 것은 오직 자기가 쌓은 업뿐이다. 그것만이 다음 생을 위한 자기의 밑천이다. 빈손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면 고달프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 여행을 위해 넉넉한 노자를 준비해야만 마음 놓고 먼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웃에게 나누어 준 모든 것이 여행의 길마다, 모퉁이마다, 당신이 카드만 넣으면 현금이 나오는 현금인출기로 늘어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업만을 쌓은 사람은 여행의 길목마다 빚쟁이를 만날 것이고, 강도를 만날 것이다. 추운 겨울날 한 겹만 두른 속옷마저도 냉혹한 강도가 벗겨갈 것이다. 이생이 그리도 고달프거던 지난날 노자를 준비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나여, 나를 위해 왜 아무 것도 준비해 두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이토록 괴로울 줄을 왜 몰랐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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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퍼스널 컴퓨터용 시스템 운용 체계. 자사의 윈도(WINDOWS)가 발표되기 전에는 전 세계의 PC 운영 체제의 80퍼센트 이상이 이 MS-DOS를 운영 체제로 채택하였다.
KB 1Byte의 정보량을 의미하는 단위이다. 360KB 36Byte가 된다. 1바이트 = 1문자.
③ 소프트웨어(프로그램)들은 한번 만들어지면 계속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거나 결함들을 보완하여 기능이 향상된다. 이렇게 새로운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그 전의 상태와 구분하기 위해 버전 번호를 붙인다. 이 버전 번호가 높을수록 최신에 제작된 소프트웨어이다.


MB((Mega Byte) 1백만Byte의 정보량을 의미하는 단위이다.
⑤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작업.
OS(Operating System)는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운영 체제 프로그램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MS-DOS는 퍼스널 컴퓨터용의 OS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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