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정복자와 응시,관찰]/♡♥ 명상 ♥♡

[스크랩] 명상특강5(펌)

가야트리샥티 2012. 4. 5. 12:37

3. 올바른 수행의 태도
1) 욕망을 충족시키며 놓기 - 탐닉과 억압을 넘어서

우리 모두는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고 무조건 눈 앞의 쾌락에 대한 욕망에 끌려 다닌다. 이것이 바로 탐닉의 단계이다. 그러다가 이 탐닉으로 인해 나중에는 고통을 받는다. 쾌락에의 탐닉은 언젠가는 반드시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점 철이 들면서 쾌락과 고통의 법칙을 이해하게 된다. 저급한 쾌락일수록 그 반대급부인 고통도 크고 또한 덧없이 빨리 끝난다는 것을 알아서 보다 고급스럽고 오래가는 쾌락을 갈구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쾌락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한성 과 영원성에 대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수행법들은 대부분 가장 큰 쾌 락인 내면의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체험을 얻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이 것을 위해서는 다른 세속적인 쾌락들을 억압한다. 가장 저급한 쾌락인 식욕과 성 욕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재물욕도 권력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다 버려야 진정 더욱 소중한 초월적인 자유, 영원한 생명,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다.
불교의 승려들은 수행을 위하여 식욕과 성욕을 억제한다. 뿐만 아니라 재물 욕도 권력욕도 명예욕도 다 뿌리치고 깊은 산중에서 수행하기도 한다. 기독교 또 한 마찬가지였다. 중세 때 그리스도교의 많은 수도사들도 극도로 욕망을 억압하 였다.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밥을 먹을 때마다 밥에다가 재를 뿌려 먹었다고 한다. 입맛이라는 감각적 쾌락을 억압하기 위해서였다. 움베르뜨 에코 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극단적인 금욕을 주장하는 호르헤라는 늙은 수사 가 모름지기 수도사는 웃어서는 안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살해하 고 있다.
 
그런데 욕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단순하게 억압만 해서는 쉽사리 사라 지기가 않는다. 그것은 때로는 용수철과 같이 억누를수록 더욱 큰 반동으로 튀어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겉으로는 잠잠하지만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용암과 같 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교묘한 형태로 위장하여 모습을 내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들은 단순히 욕망을 억압하 기보다는 고차원적으로 마음 속에서 욕망을 지워나가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 것은 욕망이라는 것이 덧없다는 것을 깊이 통찰하는 방식이다.
 
옛날에 석가모니가 그런 방법을 많이 썼다. 내 육신을 뼉다구로 생각하는 백 골관, 내 육신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부정관, 내 육신을 시체로 생각하는 시체관 등등의 수행방법들이 바로 그러한 방법들이다.
석가모니 당시에 매우 아리따운 고급 창녀가 있었다. 수많은 부호와 고관대작들이 그녀와 하룻밤을 자기 위하여 돈을 보따리로 들고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석가모니 제자들 가운데서도 은근히 그런 욕망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어느 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석가모니는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화장하지 말고 그 대로 둘 것을 허락받았다. 그런 다음에 제자들과 신도들을 데리고 그 썩은 냄새 가 나기 시작하는 시체 앞에 갔다. 사람들에게 평소 가격에 비해 훨씬 싼 가격을 제시하고 같이 잘 사람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점점 파격적인 가격으로 할인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돈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동 침할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 석가모니 는 "아무리 아름다운 몸도 죽으면 저렇게 더럽게 된다. 우리의 육체 또한 이와 마찬가지임을 알아 부질없는 욕심을 끊어라."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방법은 무작정 욕망을 억압하는 것에 비해 보다 나은 방법임에는 틀 림없다. 그러나 이 또한 욕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 설하였던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면 겉으로 보아서 는 사라지기는 하는데 우리의 무의식 더 깊은 곳에서는 그 해소되지 않은 욕망들 이 뭔가 왜곡된 채로 남게 된다. 이런 방법은 불완전연소와 같아서 욕망의 찌꺼 기가 남기 마련이다. 다만 너무 깊은 곳에 숨어있어서 본인이 잘 모를 따름이다. 욕망이란 참으로 묘한 놈이어서 그것에 탐닉해서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 고 갈증만 남기고 금욕을 통하여 없에려고 해도 불완전연소가 되어 무의식 깊은 곳에 찌꺼기를 남긴다.
이 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없는가?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욕망을 완전연소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욕망을 충족시키는 길 밖에 없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우리는 모두 다양한 형태의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욕 망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의 과정 자체가 욕망을 이루 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충족은 단순한 탐닉과는 다른 차원이다.
탐닉은 욕망 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좇아가는 것을 말한다. 욕망은 탐닉으로서는 끝을 낼 수가 없다. 욕망이란 참으로 묘하게도 탐닉할수록 더욱 더 큰 갈증만 불러일 으킬 따름이다. 충족이란 욕망의 실체를 제대로 알면서 그 욕망을 성취하는 것으 로서 나선형적으로 발전한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충족이 될 때 그 끈질긴 욕망들이 마침내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온갖 쓸데없는 욕망들을 모두 완성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사실 종류가 너무 많아 모두 충족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우리의 욕망은 오랜 세월 탐닉과 착각에 의해 쓸데없는 거품이 너무 많 이 붙어있다. 거품으로 인해 부풀려진 욕망을 다 충족시킨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래서 욕망을 충족시키고 놓기 위해서는 우선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여 반드시 충족시키야 할 건전한 욕망과 착각에서 나온 쓸데없는 거품 욕 망을 가릴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욕망 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충족시키려고 할 때 반드 시 고통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감이 아직 덜익었는데 억지로 따먹으면 떫기도 할 뿐만 아니라 배탈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중 더욱 기본적인 조 건은 욕망의 실체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러면 욕망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절한 금욕이 필 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금욕이란 무조건 억지로 욕망을 억제하거나 욕망의 실체 를 부정하고 욕망을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기존의 금욕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욕망에 대해 또렷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하기 위한 금욕이다. 금욕을 하면 의식이 맑아지면서 욕망을 성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러한 성찰력이 있을 때 욕망은 쉽게 충족된다.
충족도는 원래 내 마음의 욕망을 분모로 하고 외부의 대상을 분자로 하는 분 수이다. 분수의 값을 올리는 길은 두 가지이다. 분자를 늘리는 것과 분모를 줄이 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분자를 크게 할 생각만 하지 분모를 줄일 생각은 하 지 않는다. 금욕적인 수행자들은 분모를 줄일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보 다 현명하다. 왜냐하면 외부의 조건을 늘리는 것은 힘들어도 내부의 욕망을 줄이 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욕이 지나치면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분모를 줄 이는 것 또한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용어로 설명하자면 금욕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거품이 빠질 때까지 욕망을 줄이는 것은 효과가 매우 높지만 갈수록 그 효과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욕망의 거품이 빠진 뒤에는 더 이상 욕망을 줄이기보다 는 외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러한 경제성의 법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욕망을 깡그리 없애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무리수가 된다. 역시 자연스런 중도적 조화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금욕을 할 때에도 적절히 잡아당기 다가 풀어주는 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은 꾸준히 해보면 스스로 그 요령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먼저 모든 욕망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욕망인 식욕 성욕 수 면욕 등의 생리적 욕구에 대하여 알아보자.
다른 욕망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생리적 욕구의 실체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절한 금욕이 필요하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하였다. 먹는 것, 성생활, 그리고 심지어 잠자는 것까지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을 많이 하였다. 처음에는 나도 맹목적인 금 욕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효율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고는 점차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금욕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오랜 세월 이 지나면서 점차 욕망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욕망 가운데는 탐욕에서 나온 거칠고 조잡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연 스럽고 건전한 것도 있다. 자극적이고 끈적끈적한 음식을 탐욕스럽게 추구하는 거친 식욕이 있는가 하면 육체의 건전한 활동을 위하여 음식을 섭취하는 자연스 러운 식욕이 있다. 자연스러운 생리적인 욕구로서 그리고 사랑의 확인으로서의 건전한 성욕이 있는가 하면 변태적이고 탐닉적인 성욕이 있다. 흐리멍텅하고 나 태한 잠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활동을 위한 건전한 휴식으로서의 잠이 있다.
자연스럽지 못한 욕망들은 당연히 냉철하게 잘 관찰하여 소멸시켜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통하여 의식이 어느 정도 각성되면 부질없는 욕망들은 저절도 떨 어져 나가게 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욕망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충족을 시켜 서 놓아야 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욕망들은 충족되면서 승화가 될 때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식사와 성생활과 수면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단순히 억압만 시켜 놓으면 그 욕망들은 겉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응어리진 채로 그 사람에게 계속 따라 다 닌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는 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성욕에 대해 살펴보자. 성 에너지는 상당히 강력한 에너지이므로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무작정 금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독신수행을 하는 많은 종교인들과 수행자들은 대부분 성에 대한 욕망과 싸우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신앙의 힘 과 수행의 힘을 통하여 겉으로는 성욕을 다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불완전연소가 된 성욕의 찌꺼기들이 남아있 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깥모습에서도 그것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스러움이라는 포장 때문에 그것을 간과할 따름이다.
 
성욕은 결혼생활 을 하면서 적절한 금욕을 통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여 승화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 책이다.
다음으로는 식욕을 살펴보자. 수행을 하는 경우 특별히 어떤 음식을 금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고기를 금한다든지 어떤 경우에는 파, 마늘, 양파 등을 금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성욕을 유발시키는 음식을 금하는 것 이다. 수행의 과정상 음식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깨어있는 가운데서 욕망의 실체를 잘 파악하여 부자연스러운 식욕을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되어야지 무작정 금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리고 때 에 따라 단식을 통하여 식욕의 뿌리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단식을 통하여 식욕을 한 번이라도 극복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식욕에 대 한 이해의 정도가 상당한 차이가 난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식사는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란 보통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간혹 특별한 생식을 하거나 특이한 식이요법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일정 기간 그런 식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 만 평생을 그런 식으로 먹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특이한 식이요법을 통 하여 불치의 병을 고치거나 몸에 긍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 들은 그것에 대해 절대확신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함으로 치우친 것 이다. 다시 평범함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서는 체질상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 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상당히 긴 시간을 아예 먹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인도에도 요가수련을 통하여 몇십년을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간혹 있고 우리나라에도 최근에 삼십년 이상을 물만 먹고 사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 가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이런 사람의 경우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겸하는 경우도 생긴다. 수행이나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안목이 없는 사 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현상에 현혹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깨달 음과는 무관한 매우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은 식욕을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 시적으로 특이한 에너지 상태에 도취되어 식욕의 뿌리가 무의식 깊은 곳으로 모 습을 감추었을 뿐이다. 이 경우 언젠가는 숨겨놓았던 그 식욕과 다시 직면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언젠가'는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일 수도 있다. 식욕에 관한 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역시 보통 사람들이 먹는 평범한 음식을 먹되 그것 에 탐닉하지 않고 골고루 조금씩 먹으면서 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면욕을 살펴보자. 수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중의 졸음에 대해 고민한다. 불교에서는 잠을 수마(睡魔)라고 하고 수마를 극복하는 것을 수 행상의 주요한 과제로 여기고 있다.
구한말의 대선사였던 경허 스님은 수마를 극 복하기 위하여 칼을 목에 들이대고 수행을 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한 때 항 간을 풍미하였던 백봉거사의 보림선원에서도 매주 철야정진을 시켰고 연말에는 일주일씩 철야정진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내 주위에도 참선에 용맹정진하는 도반 들이 몇 명있는데 이들은 지금도 일주일에 이틀씩 철야정진을 한다.
처음에는 수마를 이기기 힘들어 꾸벅꾸벅 졸면서 억지로 수행하지만 열심히 수행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의식이 아주 성성하게 깨어나면서 평소 체험하지 못 한 깊은 의식상태를 체험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더욱 열심히 정진 하게 된다.
그리고 수행을 열심히 하다보면 잠을 자면서도 깨어있는 상태를 체험 하기도 한다. 이것을 오매일여(寤寐一如)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앉아서 깨어 있는 가운데서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한 다. 얼마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 같은 사람도 십몇년간을 장좌불와하였다. 아주 드물게는 몇십년 동안 전혀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가 수행자 가운데 그 런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리 바람직한 것들이 아니다. 본인들은 의식이 맑고 성성하여 수행이 잘되고 있다고 여기거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긴 안목으로 볼 때 그리 효율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
 
가장 효율적인 것은 역시 적당한 수면을 취하면서 깨어있을 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활동이 있으면 휴식이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 이다. 따라서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식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긴장을 계 속 축적시키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고양된 의식상태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나쳐서 좋은 것은 없다. 석가모니가 말한대로 현악기의 줄은 너무 탱 탱하게 감아도 너무 느슨하게 감아도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적당히 감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기존의 수행법들은 대체로 줄을 너무 탱 탱하게 감는 경향들이 있다. 이제는 적절히 감는 법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다음에는 우리 마음의 욕망이자 사회적인 욕구에 대해 살펴보자. 사회적 욕 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욕망은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이다. 생리적 욕망은 개 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그러나 재물을 소유하고 싶은 욕 망이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망 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생리적 욕망보다 훨씬 복잡한 편이다.
이것 또한 생리적 욕망에서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연스러 운 것이 있다. 왜곡된 욕망들, 예를 들면 다 쓰지도 못할 재물을 끝없이 모으려 고 하는 욕망이나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겠다는 욕망 등은 당연 히 냉철하게 그 실체를 들여다 보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의 재물 을 얻고 주변에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망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므로 마땅히 충족을 시켜야 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을 위 하여 가치있는 일을 하여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고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단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능력이 닿지 않는 욕심을 내어 그것 때문에 자신도 피곤해지고 남의 삶도 괴롭히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욕망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아울러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내적 외적 조건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내 적 외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무리한 욕심을 내는 경우 그로 인한 과보는 냉엄하다. 이럴 경우에는 처음부터 무리한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내의 조그마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그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적 욕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끝까지 남는 것은 아마도 명예욕 일 것이다. 수행의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웬만한 욕망을 다 극복하였다는 사람도 이 명예욕은 좀처럼 극복되지 않는다. 대부분 겉으로는 없는 체 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더 교묘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우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명 예욕이야말로 수행의 마지막 관문으로 여기고 이것을 지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명예욕은 의식의 진화과정에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앞 에서도 여러번 이야기하였지만 우리는 원래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이다. 그 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 속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아의 확장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의식수준 이 낮을 때에는 무력이나 금전을 사용하여 억지로 상대방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 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또한 많은 고통의 씨앗을 만든다. 그것보다 조금 더 발전되면 무력이나 금전을 쓰지않고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고급스러운 형태는 진실한 가르침으로 상 대방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명예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군 다나 수행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장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많은 존재들을 포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문제는 자기의 의식수준이 그만한 넓이나 깊이를 지니고 있지 않는데 다른 존재들을 억지로 끌어 들이려고 하는 데 있다. 수준이 안되는데 억지로 하려는 것은 그릇된 욕망이고, 추한 것이다. 그래서 눈 뜬 수행자들은 이 명예욕마저도 버릴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부질없는 명예욕을 당연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부질없는 명예욕은 버려야 하겠지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 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은 버릴 필요도 없고 사실 버려지지도 않는다.
간혹 명성을 얻는 것은 무조건 진실한 수행에 방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철저하게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자>나 <열자>에는 그러한 은자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요즈음도 대외적인 명성을 철저하게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구더기 무서 워 장 담그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도 사실 무의식 깊은 곳에 는 여전히 명성에 대한 욕구가 숨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정으로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최 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까?
끝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닦아 자신의 의식을 더욱 깊게 넓게 만드는 데에만 힘을 기울이는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명 예라는 것은 내 내면의 바램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다른 존재들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 최선을 다해 진실한 삶을 살면 다른 사람에 게 자연스럽게 삶의 그윽한 향기가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 향기에 감동받은 사람 들이 그를 칭송하고 그의 주위에 모여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간혹 처음에는 분명히 진실한 자세로 수행을 하였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들고 그를 칭송하게 되면 간혹 자신도 모르게 점차 헛된 명예욕에 사로잡히게 되 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처음에 지녔던 진실한 삶의 향기도 오히려 점차 사라 지게 된다.
 
그런데 한 번 붙어버린 헛된 명예욕은 사라지지는 커녕 더욱 커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헛된 명예욕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점차 영 혼의 화장품과 향수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의 내면이 점차 빈약해질수록 자신의 삶에서 악취가 더 많이 나올수록 화장품은 더욱 짙게 바르고 향수는 더욱 많이 뿌리게 된다.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바로 이 헛된 명예욕의 덫에 걸려 고생하 였던가? 그러므로 주변에서 사람들이 따르면 따를수록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내 면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출처 : mindcode
글쓴이 : 내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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