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
1) 세계를 바로 보기
세계의 참모습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실 세계의 궁극적인 참모습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절대객관적인 모습을 완전히 안다고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이미 거론된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설령 바로 본다하여도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이미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언어의 한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심지어는 현대물리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인 하이젠베르그와 닐스 보아는 상식적인 개념들과 용어로서는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당혹감과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는 것은 현대물리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이다.
나의 설명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시야의 한계도 있을 것이고 아울러 나의 전달력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겠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李白은 "천지는 삼라만상이 쉬었다가는 여관이요, 광음은 긴 세월 흘러가는 나그네로다.(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말을 하였다.
참으로 멋있는 말이다.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바라보자. 위로는 파아란 하늘이 있고 그 아래에는 땅이 있다. 그 사이에 삼라맘상이 펼쳐져있다. 아침이면 햇빛이 찾아오고 저녁이면 어둠이 찾아온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잠시 쉬었다가는 여관과 같은 것이고 빛과 어둠은 쉬지않고 부지런히 흘러가는 나그네이다.
위의 구절은 이 우주의 속성인 이원성을 참으로 잘 표현한 명구이다. 이 우주를 이루는 기본적인 이원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삼라만상이 잠시 머무르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 삼라만상도 이원성으로 이루어져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삼라만상의 기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는 미립자 소립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입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단위라 할지라도 질량과 부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동이라고 하는 것은 질량이나 부피와는 무관한 하나의 에너지 흐름이다. 하나의 존재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존재가 아주 조그만 입자로 있으면서 동시에 광대한 공간에 퍼져있는 파동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것이 사실임을 밝혔다. 우주의 기본요소가 입자와 파동의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중심으로 이원성을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늘 이원성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늘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와 우, 앞과 뒤, 길고 짧음, 크고 작음을 구분해야 하고 착하고 나쁨, 옳고 그름, 바르고 삿됨을 판단해야 하고 아름다움과 추함, 좋아함과 싫어함, 사랑과 미움의 여러 감정들을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뿐이랴? 나와 남, 주관과 객관, 현실과 이상, 이익과 손재, 실리와 명분 등의 수많은 이원성들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던져진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결국 고통과 쾌락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렇듯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은 이원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이원성이야말로 바로 이 우주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원성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이원성은 항상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크고 작음,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가리는 것은 항상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 없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없다. 아울러서 겉으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원성들도 사실은 그 속에 기준이 감추어져있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남과 여 등의 이원성에 대해서는 크고 작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이원성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우리의 오감과 시야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식물과 동물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식물과 동물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유글레나가 발견되었다. 아울러 곤충을 잡아먹는 동물성 식물도 있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에 대한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 또한 애매하다. 왜냐하면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남과 여의 구분도 확실히 내리기는 힘들다. 남자이면서 여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거나 여자이면서 남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중성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적 차원에서 말한 것이고 아예 생리적 차원에서 중성인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분류의 편리를 위해서는 이러한 중간적인 요소들을 모두 돌연변이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우주는 본질적으로 연속적이다. 흰 색과 검은 색 사이에는 무슨 색이 있는가? 회색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의 회색이 아니라 흰색에 아주 가까운 회색으로부터 검은 색에 아주 가까운 회색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회색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원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아울러 겉으로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는 것이다.
20세기 현대물리학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보였던 시간과 공간 마저도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시공간연속체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입자와 파동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이론도 있다. 양자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양자장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자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입자라고 하는 말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무언가 고립된 실체를 가정하는 것이다. 양자장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고립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여러 장들의 순간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그 반응결과가 입자처럼 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시공간연속체이론과 양자장이론의 핵심은 이 우주가 확실하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우주는 참으로 묘하다. 겉으로 보면 둘로 보이는데 그 깊은 속을 바로 들여다보면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인다. 겉으로 보면 둘로 보이다가 그 속을 보면 하나인 것 자체가 사실은 이원성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이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이원성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바로 이원성을 넘어서는 하나의 그것을 찾는 것이요 깨달음이란 하나의 그것을 아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깨달은 이들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고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였던가?
나는 그 수많은 이원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동시에 가장 미묘한 부분인 주관과 객관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주관과 객관은 매우 중요하다.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 아울러 주관과 객관은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거기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제는 이 관문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넘어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지닐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수행을 하여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잘 모르는 것을 설명을 한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수학과 물리학에 최고의 지식을 지닌 전문가도 블랙홀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균일한 시간과 공간을 상정하는 패러다임에서는 블랙홀 현상은 영원한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아인쉬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연속체이며 그 시공간연속체는 시공간연속체를 차지하는 질량에 의해 굽어있다. 이 경우 밀도가 아주 높은 별주위는 시공간연속체가 깔때기처럼 휘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사물들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이 정도는 중학생 이상이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과학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론 블랙홀 현상을 진짜 수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진짜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상승으로 인해 지금의 사람들은 옛날의 최고의 전문가도 풀지 못하던 것을 상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상승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수행의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많은 사람들의 상식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전문적인 수행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의 최고의 수행자들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미세한 착각들을 앞으로는 일반 사람들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 수많은 주관의식을 지닌 개체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 속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파아란 하늘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푸른 산과 맑은 강이 있고 그 속에 다양한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이 하늘과 땅, 그리고 이 지구, 이 우주는 하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속에 모든 다양한 개체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세계가 이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인류의 집단주관이다. 즉 이 세계의 모습은 정말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오감에 비친 모습일 따름이다. 의식의 차원이 다르면 이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곤충의 시각이나 청각과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같을 수가 없다. 곤충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 세계를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과학자들은 우리의 오감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주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하여 오랫 동안 노력하였다. 그들은 분자를 발견하고 원자를 발견하고 전자와 양자와 중성자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원자의 세계는 조그만 양자와 중성자를 핵으로 하고 수많은 전자들이 그 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 사이는 텅빈 공간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원자의 핵이 야구공 정도의 크기라면 서울운동장 정도의 크기 밖으로 전자들이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자는 거의 텅 빈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세계가 전자나 양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미립자 소립자의 세계에는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존재하려는 경향성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의미는 없다.
이것 또한 우주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학을 통하여 우리의 오감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찰자의 주관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주의 진짜 모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집단주관의 소산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부터 집단주관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였는데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의식들의 공통분모를 말한 것이지 실제로 우리의 의식 속에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들 중에서 서로 중첩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갑의 의식세계와 을의 의식세계는 서로 다르다. 사고 방식, 가치관, 미적 감각 등만 다른 것이 아니라 오감도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중첩이 매우 심하여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중첩이 느슨한 부분도 있다. 이 중첩이 매우 심한 부분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집단주관이다.
그리고 집단주관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 바로 흔히 우리가 객관세계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 하나의 우주는 사실은 당신의 우주와 나의 우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우주가 수없이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하나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의 중첩이다. 그 중에서 중첩이 느슨한 부분이 우리의 주관의식이고 중첩이 매우 단단하고 규모가 매우 큰 것이 객관적인 우주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단지 이 넓고 넓은 우주 속의 조그마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이 우주의 중심이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이 우주는 바로 당신과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이 우주는 분명히 당신과 나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적어도 200억년 가까운 세월 전에 탄생하였으며 이 지구는 약 45억년 전에 생겼으며 인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겨우 몇백만년도 되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이 우주는 존재하고 있었고 당신과 내가 죽어도 이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우리들의 의식의 중첩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이 우주는 분명히 우리의 의식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과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당신과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우주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너무나 좁은 영역으로 국한시켜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 각자의 의식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심리학에서는 흔히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내지는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표피적으로 알고 있는 이 의식이 바로 현재의식이고 이 현재의식 밑에는 이 현재의식보다 훨씬 더 큰 잠재의식이 있다. 잠재의식은 한 개인이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모든 정보를 보관한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한번 입력된 정보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의 창고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면을 통해 다시 꺼집어낼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잠재의식 밑에는 인류전체가 쌓아온 집단적인 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칼 융이 주장하는 집단무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잠재의식이나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현재의식이 그것을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간에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사실 현재의식은 잠재의식과 집단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일 따름이다. 집단무의식만 거론해도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 의식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개개인의 의식 속에는 무한한 우주와 영겁의 시간이 숨어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문화권과 개인적 성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무한성과 전체성을 체험한다. 수행자들이 체험한 무한성과 전체성은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이러한 무한성과 전체성이 어느 특수한 개인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의식을 지닌 모든 생명체는 이 무한성과 전체성을 다 지니고 있다. 단지 자신들이 그것을 모를 따름이다.
역대로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에는 신성이 깃들어있다 내지는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다는 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신성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은 종교적인 개념이고 종교적 개념을 배제하고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무한성과 전체성이고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다. 즉 우리 하나하나의 의식 속에는 제각기 하나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자신을 우주 전체로 인식하는 이 의식을 편의상 전체의식이라고 부르자.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작은 개체의식이라도 그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는 광대한 전체의식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실감나게 표현한 말이 바로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이다. 이는 자그마한 티끌 속에도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고 일체의 미진이 모두 다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아무리 작은 개체라도 그 의식의 깊은 속에는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으며 모든 개체의식들이 다 제각기 하나의 우주이다.
이 수많은 우주의 중첩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이 우주이다. 나의 우주 속에 당신과 갑,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고 당신의 우주 속에 나와 갑,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고 갑의 우주 속에 당신과 나, 그리고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는 생각하는 조그마한 존재는 사실 내 우주의 주인이자 동시에 당신 우주의 손님이다. 당신이라는 조그마한 존재는 당신 우주의 주인이자 내 우주의 손님이다. 이렇게 무수한 우주가 중첩되어 마치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고 그 속에 나와 당신 그리고 갑, 을, 병, 정이라는 무수한 개체가 하나의 조그마한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우주가 수많은 의식들의 중첩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겠다. 평면 위에다 서로 교차하는 여러 선들을 그어보자. 교차하는 선들이 많아지면 그 교차하는 부분은 하나의 까만 점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교차점이다. 교차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들의 중첩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선들이 매우 가늘어 우리의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매우 가는 선이 몇 개밖에 없을 때는 교차점 또한 우리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이 수천 개 수만 개라고 하자. 그럴 경우 그 선은 보이지 않지만 교차점만 크게 부각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까만 교차점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선들의 중첩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여러 선들의 중첩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이 교차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삼차원에 적용을 시킨다고 생각해보라. 모든 개체는 제각기 하나의 우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수없이 많은 우주가 서로 중첩되어 하나의 우주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의식의 중첩이라는 전제 조건이 없으면 이 딱딱한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착각에서 눈을 떠서 이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하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질 세계는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의식들의 중첩에 의해 생긴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각의 의식이 어떤 구조로 형성되어있으며 이것들이 어떠한 구조에 의해 서로 중첩되어있는지에 대해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방대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두어 가지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우리 의식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삼차원적인 공간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뾰쪽한 수가 없으므로 삼차원적인 공간으로 설명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의식은 속으로 겉으로 나올수록 서로의 중첩도가 높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중첩도가 낮은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가장 외곽지대에 있고 가장 중첩도가 높은 것은 오감이다. 인류라고 하면 피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다르겠지만 오감으로 이 세계를 인식할 때는 거의 비슷하게 인식한다.
물론 오감도 엄밀히 말하면 문화권이나 지역마다의 차이가 있고 나아가서는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다. 갑이라는 사람의 오감에 비친 장미꽃과 을이라는 사람의 오감에 비친 장미꽃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차이는 너무 미미한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시해도 된다.
우리는 이 오감의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하여 이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바로 물질세계이고 객관세계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곽지대는 이렇게 서로 맞대어 하나의 객관세계를 만들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주관성이 많아진다.
같은 장미꽃이라고 할지라도 각 개인마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나 이미지나 느낌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미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시가 있어 싫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하는 정도도 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장미를 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저 아름다운 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체험에 따라 전혀 다른 각도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세계이고 주관세계이다.
현실적으로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그 실상을 바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는 둘이 아닌 것과 같다. 물질세계는 사실은 우리들의 의식 가운데서 중첩도가 매우 높은 외각지대에 불과하다. 정신세계는 바로 의식 가운데서 중첩도가 매우 낮은 내면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단지 중첩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상은 의식들의 중첩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개개의 의식의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자.
개개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그 구조가 비슷하다. 의식의 표피는 물질적인 육체를 중심점으로 삼아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개아의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의식의 심층 밑바닥은 거대한 우주 전체를 자아로 여기는 전체의식이 숨어있다.
그렇지만 보통의 개아의식은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전체의식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없다. 이러한 자각은 개아의식이 일정 수준이상 성장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개아의식은 자기의 의식을 확장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모든 욕망은 사실 자기의 의식의 확장을 향한 다양한 몸짓들이다. 생리적 욕구, 소유욕, 권력욕, 애정욕, 성취욕, 창작욕, 지식욕, 등 모든 욕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수준이나 양상 그리고 그 결과가 실로 천차만별이지만 그 속의 본질은 한결같다. 그러한 여러 가지 욕망은 결국에는 개체의식을 초월하여 전체의식을 온전히 알아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세계의 수행법은 바로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체의식은 일상적 의식 상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하여 의식 깊은 곳에 잠수하였을 때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체의식의 상태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적 구분은 사라져버린다. 대부분의 수행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바로 이 전체의식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존의 깨달음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다 알게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든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이러한 기존의 통념은 미세한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이 세계의 올바른 구조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절대객관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잘못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개체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주와 합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객관적인 우주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자기 의식의 심층에 있는 자기의 우주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같은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각기 표피의 조그마한 개체의식에서 심층의 거대한 전체의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더 궁극적인 경지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올바른 세계관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계는 수많은 의식의 중첩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개개 의식들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이 우주는 참으로 묘한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이 거대한 물질우주는 사실 수많은 개개 의식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착각이고 동시에 이 수많은 개개 의식 또한 거대한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사실 하나의 거대한 마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대한 하나의 마음이라는 말도 맞지는 않다. 여기에는 거대하다는 공간개념이 있고 하나라는 숫자개념이 있고 마음이라는 추상개념이 있는데 실제 그 세계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인식대상도 아니고 인식주체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다 여럿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언어의 길이 끊어진 세계이다. 아울러 절대무, 절대순수 등의 어떠한 초월적인 의식상태에서도 그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체험을 만드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편의상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하나의 그 무엇이야말로 착각을 너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 수많은 각각의 우주를 만든 것도 하나의 그 무엇이요 그 수많은 각각의 우주를 중첩시켜 하나의 객관적인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끔 만든 것도 하나의 그 무엇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그 무엇에서 분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은 분리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지만 개개의 의식 속에서는 그것이 지극히 생생한 의식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조그마한 개아의식은 생과 사를 거듭하면서 점차 점차 성장한다. 그리하여 진화하여 보다 고급스러운 생명의 형태로 발전하고 마침내는 인간으로 발전한다.
인간 중에서도 여러 단계의 사람들이 있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수행의 길을 가서 자신이 거대한 우주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가서는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되면서 인식주체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의 그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한 개체가 다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차원으로 보아서는 무한히 중첩된 우주 가운데 한 우주가 소멸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모든 과정을 다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우주들에게 실로 지대한 영향력을 깨치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섭리다. 이 수많은 우주들이 모두 언젠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 이 우주는 바로 하나의 그 무엇에서 나온 수없이 많은 개개의식들이 제각기 다양한 진화발전을 거치면서 다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아름답고 장엄한 드라마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그 무엇이 만들어놓은 이원성의 착각이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것도 이원성이지만 수많은 개개 의식과 하나의 그 무엇도 바로 이원성의 착각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원성은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본질과 현상이라는 것 또한 이원성의 굴레가 아닌가? 그 뿐인가? 삶과 죽음, 고통과 쾌락, 사랑과 미움 등 그 얼마나 많은 이원성의 굴레가 우리 앞에 던져져있는가?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한 착각 속에 있는 것일까? 하나의 그 무엇은 왜 우리에게 이러한 거대한 굴레를 주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1) 세계를 바로 보기
세계의 참모습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실 세계의 궁극적인 참모습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우주의 절대객관적인 모습을 완전히 안다고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이미 거론된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설령 바로 본다하여도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이미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언어의 한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심지어는 현대물리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의 거장인 하이젠베르그와 닐스 보아는 상식적인 개념들과 용어로서는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당혹감과 절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는 것은 현대물리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이다.
나의 설명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의 시야의 한계도 있을 것이고 아울러 나의 전달력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겠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李白은 "천지는 삼라만상이 쉬었다가는 여관이요, 광음은 긴 세월 흘러가는 나그네로다.(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말을 하였다.
참으로 멋있는 말이다.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바라보자. 위로는 파아란 하늘이 있고 그 아래에는 땅이 있다. 그 사이에 삼라맘상이 펼쳐져있다. 아침이면 햇빛이 찾아오고 저녁이면 어둠이 찾아온다. 하늘과 땅은 우리가 잠시 쉬었다가는 여관과 같은 것이고 빛과 어둠은 쉬지않고 부지런히 흘러가는 나그네이다.
위의 구절은 이 우주의 속성인 이원성을 참으로 잘 표현한 명구이다. 이 우주를 이루는 기본적인 이원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삼라만상이 잠시 머무르다 사라진다. 그리고 이 삼라만상도 이원성으로 이루어져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삼라만상의 기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는 미립자 소립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입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단위라 할지라도 질량과 부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동이라고 하는 것은 질량이나 부피와는 무관한 하나의 에너지 흐름이다. 하나의 존재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존재가 아주 조그만 입자로 있으면서 동시에 광대한 공간에 퍼져있는 파동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것이 사실임을 밝혔다. 우주의 기본요소가 입자와 파동의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다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중심으로 이원성을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늘 이원성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늘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와 우, 앞과 뒤, 길고 짧음, 크고 작음을 구분해야 하고 착하고 나쁨, 옳고 그름, 바르고 삿됨을 판단해야 하고 아름다움과 추함, 좋아함과 싫어함, 사랑과 미움의 여러 감정들을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뿐이랴? 나와 남, 주관과 객관, 현실과 이상, 이익과 손재, 실리와 명분 등의 수많은 이원성들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던져진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결국 고통과 쾌락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렇듯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은 이원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이원성이야말로 바로 이 우주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원성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이원성은 항상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크고 작음,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가리는 것은 항상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 없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없다. 아울러서 겉으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원성들도 사실은 그 속에 기준이 감추어져있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 생물과 무생물 남과 여 등의 이원성에 대해서는 크고 작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이원성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우리의 오감과 시야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식물과 동물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식물과 동물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유글레나가 발견되었다. 아울러 곤충을 잡아먹는 동물성 식물도 있다. 이것은 동물과 식물에 대한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 또한 애매하다. 왜냐하면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바이러스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남과 여의 구분도 확실히 내리기는 힘들다. 남자이면서 여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거나 여자이면서 남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중성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리적 차원에서 말한 것이고 아예 생리적 차원에서 중성인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분류의 편리를 위해서는 이러한 중간적인 요소들을 모두 돌연변이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우주는 본질적으로 연속적이다. 흰 색과 검은 색 사이에는 무슨 색이 있는가? 회색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의 회색이 아니라 흰색에 아주 가까운 회색으로부터 검은 색에 아주 가까운 회색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회색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원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아울러 겉으로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는 것이다.
20세기 현대물리학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보였던 시간과 공간 마저도 사실은 하나의 연속체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시공간연속체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입자와 파동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이론도 있다. 양자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양자장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자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입자라고 하는 말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무언가 고립된 실체를 가정하는 것이다. 양자장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고립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여러 장들의 순간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그 반응결과가 입자처럼 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시공간연속체이론과 양자장이론의 핵심은 이 우주가 확실하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 우주는 참으로 묘하다. 겉으로 보면 둘로 보이는데 그 깊은 속을 바로 들여다보면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보인다. 겉으로 보면 둘로 보이다가 그 속을 보면 하나인 것 자체가 사실은 이원성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이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이원성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바로 이원성을 넘어서는 하나의 그것을 찾는 것이요 깨달음이란 하나의 그것을 아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깨달은 이들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고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였던가?
나는 그 수많은 이원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동시에 가장 미묘한 부분인 주관과 객관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주관과 객관은 매우 중요하다. 이 관문을 넘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 아울러 주관과 객관은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거기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제는 이 관문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넘어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지닐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수행을 하여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잘 모르는 것을 설명을 한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수학과 물리학에 최고의 지식을 지닌 전문가도 블랙홀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절대균일한 시간과 공간을 상정하는 패러다임에서는 블랙홀 현상은 영원한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아인쉬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연속체이며 그 시공간연속체는 시공간연속체를 차지하는 질량에 의해 굽어있다. 이 경우 밀도가 아주 높은 별주위는 시공간연속체가 깔때기처럼 휘어지기 때문에 주변의 사물들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이 정도는 중학생 이상이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과학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론 블랙홀 현상을 진짜 수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진짜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상승으로 인해 지금의 사람들은 옛날의 최고의 전문가도 풀지 못하던 것을 상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상승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수행의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많은 사람들의 상식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전문적인 수행가들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의 최고의 수행자들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미세한 착각들을 앞으로는 일반 사람들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 수많은 주관의식을 지닌 개체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 은하계가 있고 은하계 속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 안에 지구가 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파아란 하늘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푸른 산과 맑은 강이 있고 그 속에 다양한 삼라만상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이 하늘과 땅, 그리고 이 지구, 이 우주는 하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속에 모든 다양한 개체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세계가 이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인류의 집단주관이다. 즉 이 세계의 모습은 정말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오감에 비친 모습일 따름이다. 의식의 차원이 다르면 이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곤충의 시각이나 청각과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같을 수가 없다. 곤충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 세계를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과학자들은 우리의 오감의 한계를 넘어서는 우주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하여 오랫 동안 노력하였다. 그들은 분자를 발견하고 원자를 발견하고 전자와 양자와 중성자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원자의 세계는 조그만 양자와 중성자를 핵으로 하고 수많은 전자들이 그 핵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 사이는 텅빈 공간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원자의 핵이 야구공 정도의 크기라면 서울운동장 정도의 크기 밖으로 전자들이 돌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자는 거의 텅 빈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세계가 전자나 양자보다 더 작은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미립자 소립자의 세계에는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존재하려는 경향성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의미는 없다.
이것 또한 우주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학을 통하여 우리의 오감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찰자의 주관적인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관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우주의 진짜 모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집단주관의 소산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부터 집단주관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였는데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의식들의 공통분모를 말한 것이지 실제로 우리의 의식 속에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집단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들 중에서 서로 중첩되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갑의 의식세계와 을의 의식세계는 서로 다르다. 사고 방식, 가치관, 미적 감각 등만 다른 것이 아니라 오감도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중첩이 매우 심하여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중첩이 느슨한 부분도 있다. 이 중첩이 매우 심한 부분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집단주관이다.
그리고 집단주관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 바로 흔히 우리가 객관세계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그 하나의 우주는 사실은 당신의 우주와 나의 우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우주가 수없이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하나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한 세계의 중첩이다. 그 중에서 중첩이 느슨한 부분이 우리의 주관의식이고 중첩이 매우 단단하고 규모가 매우 큰 것이 객관적인 우주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단지 이 넓고 넓은 우주 속의 조그마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이 우주의 중심이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이 우주는 바로 당신과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이 우주는 분명히 당신과 나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적어도 200억년 가까운 세월 전에 탄생하였으며 이 지구는 약 45억년 전에 생겼으며 인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겨우 몇백만년도 되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이 우주는 존재하고 있었고 당신과 내가 죽어도 이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우리들의 의식의 중첩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이 우주는 분명히 우리의 의식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과 내가 태어나기 전이나 당신과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우주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너무나 좁은 영역으로 국한시켜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 각자의 의식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심리학에서는 흔히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내지는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표피적으로 알고 있는 이 의식이 바로 현재의식이고 이 현재의식 밑에는 이 현재의식보다 훨씬 더 큰 잠재의식이 있다. 잠재의식은 한 개인이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모든 정보를 보관한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한번 입력된 정보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의 창고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면을 통해 다시 꺼집어낼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적인 잠재의식 밑에는 인류전체가 쌓아온 집단적인 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칼 융이 주장하는 집단무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잠재의식이나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현재의식이 그것을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간에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사실 현재의식은 잠재의식과 집단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일 따름이다. 집단무의식만 거론해도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 의식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개개인의 의식 속에는 무한한 우주와 영겁의 시간이 숨어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문화권과 개인적 성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무한성과 전체성을 체험한다. 수행자들이 체험한 무한성과 전체성은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이러한 무한성과 전체성이 어느 특수한 개인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라 의식을 지닌 모든 생명체는 이 무한성과 전체성을 다 지니고 있다. 단지 자신들이 그것을 모를 따름이다.
역대로 깨달음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에는 신성이 깃들어있다 내지는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다는 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신성이니 불성이니 하는 것은 종교적인 개념이고 종교적 개념을 배제하고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무한성과 전체성이고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다. 즉 우리 하나하나의 의식 속에는 제각기 하나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자신을 우주 전체로 인식하는 이 의식을 편의상 전체의식이라고 부르자.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작은 개체의식이라도 그 의식의 가장 밑바닥에는 광대한 전체의식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실감나게 표현한 말이 바로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이다. 이는 자그마한 티끌 속에도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고 일체의 미진이 모두 다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아무리 작은 개체라도 그 의식의 깊은 속에는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으며 모든 개체의식들이 다 제각기 하나의 우주이다.
이 수많은 우주의 중첩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이 우주이다. 나의 우주 속에 당신과 갑,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고 당신의 우주 속에 나와 갑,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고 갑의 우주 속에 당신과 나, 그리고 을, 병, 정이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는 생각하는 조그마한 존재는 사실 내 우주의 주인이자 동시에 당신 우주의 손님이다. 당신이라는 조그마한 존재는 당신 우주의 주인이자 내 우주의 손님이다. 이렇게 무수한 우주가 중첩되어 마치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고 그 속에 나와 당신 그리고 갑, 을, 병, 정이라는 무수한 개체가 하나의 조그마한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우주가 수많은 의식들의 중첩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겠다. 평면 위에다 서로 교차하는 여러 선들을 그어보자. 교차하는 선들이 많아지면 그 교차하는 부분은 하나의 까만 점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교차점이다. 교차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들의 중첩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선들이 매우 가늘어 우리의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매우 가는 선이 몇 개밖에 없을 때는 교차점 또한 우리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이 수천 개 수만 개라고 하자. 그럴 경우 그 선은 보이지 않지만 교차점만 크게 부각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까만 교차점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선들의 중첩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여러 선들의 중첩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이 교차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삼차원에 적용을 시킨다고 생각해보라. 모든 개체는 제각기 하나의 우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수없이 많은 우주가 서로 중첩되어 하나의 우주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의식의 중첩이라는 전제 조건이 없으면 이 딱딱한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착각에서 눈을 떠서 이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도록 하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질 세계는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의식들의 중첩에 의해 생긴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각의 의식이 어떤 구조로 형성되어있으며 이것들이 어떠한 구조에 의해 서로 중첩되어있는지에 대해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방대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두어 가지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우리 의식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삼차원적인 공간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뾰쪽한 수가 없으므로 삼차원적인 공간으로 설명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의식은 속으로 겉으로 나올수록 서로의 중첩도가 높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중첩도가 낮은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가장 외곽지대에 있고 가장 중첩도가 높은 것은 오감이다. 인류라고 하면 피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다르겠지만 오감으로 이 세계를 인식할 때는 거의 비슷하게 인식한다.
물론 오감도 엄밀히 말하면 문화권이나 지역마다의 차이가 있고 나아가서는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다. 갑이라는 사람의 오감에 비친 장미꽃과 을이라는 사람의 오감에 비친 장미꽃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차이는 너무 미미한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거의 무시해도 된다.
우리는 이 오감의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하여 이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바로 물질세계이고 객관세계이다.
우리의 의식은 외곽지대는 이렇게 서로 맞대어 하나의 객관세계를 만들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주관성이 많아진다.
같은 장미꽃이라고 할지라도 각 개인마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나 이미지나 느낌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미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가시가 있어 싫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하는 정도도 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장미를 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저 아름다운 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체험에 따라 전혀 다른 각도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세계이고 주관세계이다.
현실적으로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러나 그 실상을 바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는 둘이 아닌 것과 같다. 물질세계는 사실은 우리들의 의식 가운데서 중첩도가 매우 높은 외각지대에 불과하다. 정신세계는 바로 의식 가운데서 중첩도가 매우 낮은 내면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단지 중첩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이상은 의식들의 중첩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개개의 의식의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자.
개개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그 구조가 비슷하다. 의식의 표피는 물질적인 육체를 중심점으로 삼아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개아의식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의식의 심층 밑바닥은 거대한 우주 전체를 자아로 여기는 전체의식이 숨어있다.
그렇지만 보통의 개아의식은 자신의 의식 깊은 곳에 전체의식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없다. 이러한 자각은 개아의식이 일정 수준이상 성장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개아의식은 자기의 의식을 확장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모든 욕망은 사실 자기의 의식의 확장을 향한 다양한 몸짓들이다. 생리적 욕구, 소유욕, 권력욕, 애정욕, 성취욕, 창작욕, 지식욕, 등 모든 욕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수준이나 양상 그리고 그 결과가 실로 천차만별이지만 그 속의 본질은 한결같다. 그러한 여러 가지 욕망은 결국에는 개체의식을 초월하여 전체의식을 온전히 알아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세계의 수행법은 바로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체의식은 일상적 의식 상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하여 의식 깊은 곳에 잠수하였을 때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체의식의 상태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적 구분은 사라져버린다. 대부분의 수행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바로 이 전체의식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존의 깨달음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다 알게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든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이러한 기존의 통념은 미세한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이 세계의 올바른 구조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절대객관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잘못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개체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우주와 합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객관적인 우주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자기 의식의 심층에 있는 자기의 우주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같은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각기 표피의 조그마한 개체의식에서 심층의 거대한 전체의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더 궁극적인 경지로 나아갈 수 없었다.
올바른 세계관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계는 수많은 의식의 중첩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개개 의식들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이 우주는 참으로 묘한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이 거대한 물질우주는 사실 수많은 개개 의식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착각이고 동시에 이 수많은 개개 의식 또한 거대한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착각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사실 하나의 거대한 마음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대한 하나의 마음이라는 말도 맞지는 않다. 여기에는 거대하다는 공간개념이 있고 하나라는 숫자개념이 있고 마음이라는 추상개념이 있는데 실제 그 세계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인식대상도 아니고 인식주체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다 여럿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것은 볼 수 있거나 알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언어의 길이 끊어진 세계이다. 아울러 절대무, 절대순수 등의 어떠한 초월적인 의식상태에서도 그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체험을 만드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편의상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하나의 그 무엇이야말로 착각을 너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 수많은 각각의 우주를 만든 것도 하나의 그 무엇이요 그 수많은 각각의 우주를 중첩시켜 하나의 객관적인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끔 만든 것도 하나의 그 무엇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그 무엇에서 분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은 분리라는 것 자체가 착각이지만 개개의 의식 속에서는 그것이 지극히 생생한 의식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조그마한 개아의식은 생과 사를 거듭하면서 점차 점차 성장한다. 그리하여 진화하여 보다 고급스러운 생명의 형태로 발전하고 마침내는 인간으로 발전한다.
인간 중에서도 여러 단계의 사람들이 있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수행의 길을 가서 자신이 거대한 우주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긴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가서는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되면서 인식주체 자체가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의 그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한 개체가 다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차원으로 보아서는 무한히 중첩된 우주 가운데 한 우주가 소멸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모든 과정을 다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수많은 우주들에게 실로 지대한 영향력을 깨치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섭리다. 이 수많은 우주들이 모두 언젠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 이 우주는 바로 하나의 그 무엇에서 나온 수없이 많은 개개의식들이 제각기 다양한 진화발전을 거치면서 다시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생긴 아름답고 장엄한 드라마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그 무엇이 만들어놓은 이원성의 착각이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것도 이원성이지만 수많은 개개 의식과 하나의 그 무엇도 바로 이원성의 착각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원성은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본질과 현상이라는 것 또한 이원성의 굴레가 아닌가? 그 뿐인가? 삶과 죽음, 고통과 쾌락, 사랑과 미움 등 그 얼마나 많은 이원성의 굴레가 우리 앞에 던져져있는가?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한 착각 속에 있는 것일까? 하나의 그 무엇은 왜 우리에게 이러한 거대한 굴레를 주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출처 : mindcode
글쓴이 : 내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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