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
2) 삶을 바로 보기
우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왜 우리는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의 파노라마 속에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이 질문들은 우리 인간의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이 여러 각도에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구할 따름이고 그 가운데서 보다 설득력 있는 답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따름이다.
여기서도 정답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답을 구할 따름이다.
이 세계의 속성이 이원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로 보는 것도 결국은 이원성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는 데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루었는데 여기에서는 고통과 쾌락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고통과 쾌락이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의 삶에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쾌락이 널려져 있다. 당장 한 끼만 굶어도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 쾌락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이나 쾌락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형태의 정신적인 고통이나 쾌락도 있고 나아가 더 깊은 영혼의 고통과 쾌락도 있다. 한 때는 쾌락을 주었던 것이 나중에는 고통으로 변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깊은 쾌락을 주는 것도 있다. 이렇듯 고통과 쾌락에는 실로 다양한 차원과 양상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듯 실로 다양한 양상과 차원의 고통과 쾌락이 존재하고 있는데, 과연 이 모든 고통과 쾌락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무엇이고 가장 궁극적인 쾌락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기를 싫어하고 삶을 갈구한다. 그래서 삶은 쾌락의 원천이요 죽음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것으로서 고통의 으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이 항상 기쁨을 주고 죽음이 항상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살아있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고 죽는 것이 더욱 편안할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살아도 고통, 죽어도 고통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근원적인 고통과 쾌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근원적인 고통과 궁극적인 쾌락은 과연 무엇일까?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고통은 하나의 그 무엇에서 분리되어 유한성과 개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쾌락이란 바로 유한한 개체성을 초월하여 하나의 그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아울러 매우 실존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개체들은 유한성을 숙명으로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넓고 넓은 우주는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유한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는가?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실로 영원한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고래로부터 세계 곳곳에는 각기 제나름대로 인간의 숙명을 그린 신화들이 전래되어 오고 있다.
그중 유대민족의 신화는 매우 흥미 있고도 가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지혜가 생겼기 때문에 창조주의 노여움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이로 인해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부 고지식한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기도 하지만 이것은 신화와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선악과의 실제적인 의미는 이원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어 지혜가 밝아졌다는 것은 결국 분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이원성의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이원성의 근원은 나와 세계의 분별이다. 즉 이것은 개체성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의 그 무엇에서 분화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원성의 세계에 들어옴으로 인해 모든 고통과 죄악이 있게 되었고 죄의 삯은 결국 죽음으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원성의 세계에서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어야 하니까. 이것은 신화라는 방식을 통하여 개체성의 숙명을 풀이한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석가모니는 존재의 숙명을 신화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2500년 전 당시에 그렇게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한 종교가는 전 세계에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인도와 같이 신화적인 사고가 팽배하던 곳에서 그렇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가르침을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석가모니의 위대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개체성의 숙명인 죽음의 원인이 바로 무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십이연기법은 우리 인간이 생로병사하게 되는 과정을 인식론적인 용어로써 열두 가지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장 근본적인 뿌리가 바로 무명이다. 무명이란 밝지 못하다는 뜻으로서 어리석다는 말이다.
석가모니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 '나'라는 실체는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는 원래 하나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라는 개체성이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명이 뿌리가 되어 여러 개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육체적인 탄생이 있게 되고 탄생된 것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숙명을 피할 수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무명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가? 불교에서는 무명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그 시작도 알 수 없는 아득한 과거에 그냥 생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선악과를 먹어서 지혜가 밝아져 원죄를 얻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데 비해 불교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어리석음 때문에 삶과 죽음의 굴레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개체성을 지니게 된 것을 모든 고통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점을 보이고 있다.
하나에서 둘로 분화된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나 불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영어에서 부정적인 뜻을 지닌 'dis'라는 접두어는 바로 둘을 의미한다. 'dis'라는 접두어가 들어가는 단어는 대부분 좋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병을 가리키는 'disease'나 논쟁을 가리키는 'disagree' 등등이 그 예이다. 요가 철학에서는 덧없는 이 현상계를 흔히 마야라고 말하는데, 마야의 속성은 바로 이원성에 있다고 말한다. 이원성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뿌리인 것이다.
그러면 가장 궁극적인 쾌락으로 나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이원성을 극복하여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고 개체성을 극복하여 전체성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체성을 초극할 때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원시시대로부터 인간은 여러 가지 주술이나 약초 등을 통하여 무아지경을 느끼려고 하였다. 그들은 무아지경에서 엄청난 황홀경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그리 세련되고 효율적인 방법들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보다 항구적으로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무한성을 회복하는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세계의 수많은 수행법들과 깨달음들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오게 된 것들이다.
요가에서 말하는 범아일여나, 탄트라에서 말하는 시바와 샥티의 합일이나, 단학에서 말하는 原始反本(처음으로 거슬러가고 뿌리로 되돌아간다)이나, 도덕경에서 말하는 抱一(하나를 머금는다)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나,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수행자들이 추구하였던 신 속에서 에고를 소멸시켜 신과 하나가 되고자 하였던 것들은 각기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고 의식형태의 양상도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한결같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바로 유한한 개체성을 극복하고 다시금 무한한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성을 극복하고 전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쾌락보다 더 큰 쾌락이다.
그래서 기존의 종교나 수행체계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를 보자.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인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속죄양인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을 부정하고 오로지 천국에서의 영생만을 갈구한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밑도 끝도 없는 아득한 과거로부터의 무명으로 인해 끝없이 생사윤회한다. 이것을 벗어나는 길은 모든 욕망과 근심과 무지를 버리고 해탈에 이르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을 더럽고 탁한 것으로 규정하고 고요하고 초월적인 열반만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 외 대부분의 종교나 수행법에서 현실의 삶을 부정하고 영원하고 궁극적인 그 무엇을 추구한다.
이상이 기존의 종교와 수행법의 삶에 대한 통찰력의 핵심이다.
이러한 태도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아직은 부족한 점이 있다. 모든 존재가 원래의 하나의 그 무엇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하나의 그 무엇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실로 영원에서 왔다가 영원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란 영원에서 왔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는 사이에 존재하는 짧은 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덧없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대부분의 성자들과 수행자들은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나도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난 뒤에 다시 삶을 바라보니 여기에는 미세한 착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현재의 과정의 소중함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목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현재의 과정은 부정적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의 기나긴 생사윤회는 단순히 무명에 의해 생긴 고통의 바다에 불과한 것이고 현재의 이 삶도 영원한 천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간이역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삶은 신이 까닭 없이 부여한 원죄나 밑도 끝도 없는 무명에 의해서 초래된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택한 창조적 유희라는 것이다. 시야를 좀 넓혀 이 세상을 바라다보자. 해가 질 무렵 낙조에 비치는 산과 들을 바라다보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운 우주는 누가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만들었을까?
현재까지의 과학의 수준으로는 이 우주가 원초적 미분화의 상태에서 분화 팽창되기 시작하여 초기의 단순한 형태에서 점차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다는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이 우주가 어떠한 형식으로 점차 분화발달되어 왔는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여기에 대한 답은 주관적이고도 문학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이 우주의 처음과 끝은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기서는 우주가 이렇게 원초적인 미분화상태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변해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그 무엇의 창조적 유희라고 말하고 싶다.
인도신화에서는 이 거대한 우주 전체를 시바신의 춤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서 죽는다. 그 수많은 별들이 조화와 질서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별의 하나인 지구 속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도 태어나고 죽고, 먹고 먹히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흥하고 망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간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춤인가? 우리의 삶은 바로 이 거대한 우주의 아름다운 창조적 유희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우주의 창조적 유희의 꼭두각시들인가? 아무 이유 없이 창조되어져서 원죄나 무명에 의해 하는 수 없이 질질 끌려다니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본질적으로 우리들 하나 하나는 바로 이 우주적 유희에 마지못해 참여하는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 유희를 즐기는 주체적인 참여자들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보았듯이 겉으로 볼 때 우리는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하나 하나의 개체이지만 좀 더 깊게 살펴보면 부분과 전체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는 '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가 전부이고 전부가 하나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심오한 말인가? 이것은 부분과 전체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자그마한 육체를 자기의 전부라고 여기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에는 모두 제각기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지니고 있다. 이 수많은 우주들은 결국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의 그 무엇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다 이 우주의 주인이다. 이 우주의 아름답고도 장엄한 드라마는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다. 우리 자신들 하나 하나가 바로 이 드라마의 기획자요, 연출자요, 동시에 그 속의 배우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참모습을 알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을 연출자의 지시에 의해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배우로 착각할 수 밖에 없다. 깨어나 자신의 참모습을 바로 보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바로 이 삶의 드라마를 즐기고 있는 유희의 주체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유희라는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이 고통은 하늘이 준 형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전생에 지은 죄가 너무 두터워 받는 고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영원히 끝나지 않는 어둡고도 긴 터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누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던져주었는가를 고민하고 원망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너무나 좁고 짧은 생각이다.
좀 더 넓게 길게 생각해보자.
하늘은 우리에게 따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하늘이 형벌을 가한다는 생각은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전생에 지은 죄가 두터워서 지금의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은 이 보다는 훨씬 진화된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비록 초보적이고 엉성하기는 하지만 우주의 인과율을 이해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겪는 고통과 쾌락은 분명히 과거의 원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응과응보의 이론도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한계가 드러난다.
과거의 원인은 또한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그보다 더 앞선 과거의 원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또 그것의 원인은? 결국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인과응보의 이론으로는 최초에 왜 이러한 고통이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불교는 이것을 풀 길이 없어 그냥 밑도 끝도 없는 아득한 과거에 그냥 무명이 생겼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궁색한 설명이다. 그러면 우리가 겪는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궁극적인 원인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나긴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거듭하면서 겪는 고통과 쾌락은 하나의 개체가 무한한 전체성을 알아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모든 개체에게는 제각기 자신의 길이 있다. 따라서 제각기 겪어야할 고통과 쾌락의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양은 모두 같다. 우리는 제각기 그 속에서 고통과 쾌락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하나의 조그마한 개체성에서 무한한 전체성을 찾아가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하나 하나는 제각기의 길을 따라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는 조그마한 시냇물들인 것이다. 깊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가파른 길과 평탄한 길을 다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가다보면 폭포와 같이 거센 지형을 만나 고생을 할 때도 있고 넓고 넓은 호수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 모두가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바다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한 생애에 많은 격동을 겪은 사람은 그 무의식의 메카니즘에 따라 다음 생에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보내려고 한다. 그러다가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다시 가파른 길을 택한다. 그렇게 생애에 생애를 거듭하면서 여러 가지 욕망들을 완성하면서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면서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현재 의식은 자신의 삶의 거대한 흐름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파르고 험난한 길을 갈 때는 하늘의 형벌이라고도 생각하고 전생의 업장때문이라고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그리고 깊게 보았을 때는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고통이나 쾌락은 모두 하나의 개체가 나아가는 길의 특성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리 크고 긴 고통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는 다시 쾌락이 찾아온다. 물론 쾌락 또한 언젠가는 끝이 있다. 낮과 밤이 서로 교체하듯이 우리들도 쾌락과 고통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반복을 하면서 나선형적으로 발전하여 보다 더 깊고 큰 쾌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궁극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전 과정 자체가 바로 유희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고통과 쾌락의 파노라마를 펼치면서 조그마한 개체성에서 거대한 전체성의 바다로 나아가는 자체가 사실은 바로 유희인 것이다. 그것은 이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희란 본래 목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즐기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인 것이다.
사실 본질적으로 이 우주는 과정과 목적이 둘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정과 목적을 둘로 나누어보았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원성의 한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과정과 목적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보면 이 삶의 과정 자체가 바로 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전과정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목표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해야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원래 우리는 종점을 알 수 없다. 삶의 길은 참으로 묘한 길이다.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는, 즉 아직 살아있을 때는 어떠한 종점도 궁극적인 종점은 될 수 없다. 그리고 종점에 이르는 그 순간 이미 인식의 주체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 종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깨달음의 패러다임에서는 종점을 알 수 있다고 착각을 하여왔다. 그리하여 그 종점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과정은 무시해왔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삶을 부정하고, 저 언덕에 있는 해탈을 위하여 이 삶을 한시라도 빨리 건너가야 할 고통의 바다라고 여겨왔다. 이제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아야 한다. 종점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를 종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미세한 착각이다. 이런 미세한 착각이 있는 한 진정한 종점에 이를 수는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하게도 종점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길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천국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보지 말자. 그리고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보지 말자. 아울러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거나 업장 많은 중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이러한 것들은 의식이 아직 미성숙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말들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러한 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말들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보다 성숙된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자. 이 우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질 무렵 곱게 물든 저녁 노을을 바라보자.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관조해보자. 사랑과 미움과 만남과 헤어짐의 파노라마를 거시적으로 바라보자. 그것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우주와 자연과 우리의 삶은 사실 참으로 아름다운 대파노라마인 것이다. 이제 우리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말자. 우리 하나 하나가 모두 이 아름다운 창조적 유희의 주연이자 감독이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유희의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희는 그냥 장난으로 내지는 함부로 하는 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는 뼈를 깍고 살을 찢는 처절한 고통과 달콤하고 황홀한 쾌감이 있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과 벅차오르는 기쁨이 있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희망이 있고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온 몸에 깊은 휴식을 주는 잔잔한 평화가 있다.
이 모든 것을 어찌 단순히 유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유희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심오하고도 진지한 유희이다. 그리고 이 유희는 유희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유희다.
간혹 수행자 가운데서는 의식이 각성되어 우리의 삶을 유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수행자들도 있다. 이것은 미세한 착각이다.
그렇게 해서는 이 유희를 끝낼 수 없다. 이 유희를 마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그 유희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활짝 꽃피워야 한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개화하였을 때 그것은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삶의 완성이요 깨달음의 완성이다.
이상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100%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오류의 가능성을 항상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강호제현들의 질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세계관과 인생관이 적어도 기존의 여러 종교나 수행법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한계를 한 차원 넘어선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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