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정복자와 응시,관찰]/♡♥ 명상 ♥♡

[스크랩] 명상특강 2 (펌)

가야트리샥티 2012. 4. 5. 12:40
명상의 세계는 실로 깊고도 넓다. 명상의 방법이나 철학적 체계도 다양하지만 명상 중에 나타나는 현상도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는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거나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등등의 일반적인 현상도 있지만 기를 느낀다든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눈앞에 빛이 나타난다든지 자아의식이 사라진다든지 의식이 확장되어 자신이 우주에 편재해 있는 것을 느낀다든지 등등의 신비한 현상도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일단 그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틀을 두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는 하나는 주관적 착각의 문제이고 하나는 삶의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이다.

주관적 착각을 주의해야 한다

명상을 해서 몸이 가벼워지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등의 현상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심과 사랑이 늘어나서 대인관계가 원만해진다면 더욱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명상이 점점 더 깊어지면 여러 가지 특수한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주관적 현상을 객관적 진리로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발생하여 회음으로 가서 척추를 타고 위로 상승하여 백회를 거쳐 다시 단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명상 중에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찬란한 빛 속에서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당신은 이것이 주관적 착각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객관적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명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관적 착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나지도 않고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명상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관적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주관적 착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는 증명되지는 않은 진리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관적 착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사람들은 아직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신 주변의 사람 가운데는 당신과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많은 단학 도장에서 당신과 비슷한 기의 체험을 하고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 중에 당신과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당신과 같은 길을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체험하였고 지금도 체험하고 있다.
혼자일 때는 주관적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주관적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수련이 깊지 못해서이거나 아직 신앙심이 깊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체험으로 인해 단학에 대한 당신의 확신과 기독교에 대한 당신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가를 하는 사람은 단학과 전혀 다른 통로의 기를 체험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명상이나 기도 중에 천사를 보지 않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자신들의 체험에 대해 절대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명상을 하다가 기의 각성을 체험하거나 어떤 영적 존재가 현시 하는 것은 명상의 세계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현상을 체험한다는 사실 자체는 적어도 명상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가 어느 특정한 통로로 흐르는 것을 체험하거나 특정한 형태의 영적 존재의 현시를 체험하는 것은 주관적 착각이다.
이것은 마치 색안경을 끼고 어떤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붉은 안경을 쓰고 보면 그것은 붉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고 보면 파랗게 보인다. 붉은 색깔과 파란 색깔은 분명히 색안경으로 인해 나타난 착각이다. 그렇지만 색안경에 나타난 그 사물의 형태마저 착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사물의 형태가 을 객관적인 진리라면 그 사물을 바라보는 색안경은 주관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 중에 체험하는 특정한 기의 통로나 특정한 형상의 현시는 바로 이러한 주관적 틀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틀은 개인적인 틀이 아니라 집단적인 틀이다. 왜냐하면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틀이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집단 주관의 틀이라고 한다. 이 집단 주관은 명상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마다 각기 서로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주관이다. 그런데 어떠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집단 특유의 공통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집단 주관이다. 이 집단 주관은 인종, 민족, 종교, 문화권, 지역권에 따라 매우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 개개인의 주관은 중층적인 집단 주관의 틀 위에 형성되어 있다.
 
개인적인 주관일 경우는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주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조금만 부딪히다 보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은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러나 집단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집단 주관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관이라는 것을 간파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집단 주관적 착각이다.
명상을 함에 있어서 참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집단 주관에 비친 것을 마치 절대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명상가들과 종교인들이 자기가 속한 종교권 내지는 문화권의 집단 주관의 틀을 통해 체험한 것들을 마치 절대 객관의 진리인양 착각하고 있는가?
이제는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집단 주관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자아와 세계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할 때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 구조와 원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으로 제대로 된 명상을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명상을 하면 여러 가지 많은 육체적 정신적 변화가 나타난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러한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진정 필요한 것이지만 특히 바삐 돌아가는 일상을 좇아가느라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명상을 조금 더 깊이 해보면 보통의 상태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값진 것들을 체험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고양되어 황홀감을 느끼기도 하고 삶과 우주에 대하여 깊고 오묘한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명상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명상들은 특정한 영역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도리어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많다. 나도 주변에서 특정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명상에 너무 심취하여 도리어 폐인이 된 사람을 종종 보았다.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명상의 세계에 심취한 사람 가운데는 일상 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특정 부분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이 되는 경우이다. 명상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는 부분적 효율성과 전체적 효율성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부분은 사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일상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명상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에도 전문 수도사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고독한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은 명상의 세계에 심취되어 있기 때문에 일상의 현실 세계를 돌볼 여유가 없다. 그리하여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서 수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실 나 자신도 처음 명상에 입문할 때는 입산 수도를 결심하였다. 당시 나는 요가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졸업후 히말라야에 가서 깊은 산 속에서 평생을 진리를 향하여 수도할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한 때는 승려로 출가할 계획도 지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명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안목이 생기면서 그러한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자기에 내면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삶의 과정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자기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물론 세속을 떠난 명상 수행자들의 고결한 삶은 세상 사람들에게 지표가 되기도 하고 욕심에 찌들린 보통 사람들에게는 청량제 역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제대로 된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와야 하며 그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진짜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신의 내면 세계에 깊이 심취한 사람에게 있어 현실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삶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에 이르는 초월적인 깨달음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초월적인 깨달음이 진정하고도 진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진정 완전한 깨달음이라면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그것을 얻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명상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다.
나 또한 한 때는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무기한 단식 수행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여 죽기 살기로 수행하였다. 그 결과 그렇게도 바라던 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내면의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완전한 경지가 아니라 그것과 아울러 외면의 일상의 삶을 다듬어 완성하는 것이 더 완전한 경지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면의 삶에만 치우쳐 자기 내면을 돌 볼 틈이 없다. 그래서 자기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소중한 보물들을 알지 못하고 외면의 현실에만 끌려 다닌다. 이에 대한 반동 작용으로 명상이나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외면의 삶을 무시하고 내면의 보물들을 찾는 것만 중시한다.
외면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그것에 끌려 다니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내면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외면의 세계를 소홀히 하는 것 또한 삶의 전체적인 효율성에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부분의 효율성의 증대는 전체의 효율성의 증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종종 부분의 효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조화가 깨어지는 경우 부분의 효율성의 증대가 도리어 전체적인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근대의 서구 과학은 우리 인간의 외적인 삶을 담당하는 물질 영역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지나친 발달은 도리어 전체적으로는 부조화를 낳기도 한다.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물질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전체적인 삶의 질은 별로 향상되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 가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명상이나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여 그 방면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한 쪽으로 치우칠 경우 길게 보면 결국 삶의 전체적인 효율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효율성보다는 전체적인 삶의 효율성을 추구할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명상이나 종교의 세계에 있어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초능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간혹 여러 가지 초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를 예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거나 병을 치유하는 능력 등이 그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수준높은 초능력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초능력에 약하다.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한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전체적인 삶의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감추고 교묘하게 자기 합리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겉으로는 이러한 능력이 별것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속으로는 그 힘으로 대중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호도 하는 행위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바로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간과하고 의식의 특정 영역을 각성시키는 것만을 중시하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올바른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제 집단 주관인 색안경을 벗어 던지고 여러 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삶에 대한 부분적인 시야를 극복하고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이러할 때 명상은 삶의 길에 있어서 진정으로 소중한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변(mindchanger)

출처 : mindcode
글쓴이 : 내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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